캔버라를 여행지로 택한 건 호주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캔버라로 가는 버스는 시드니 기차 역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탈 수 있었다. 일반 시내버스 정류장 근처였고 시외버스가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나라와는 터미날의  개념이나 상황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호주의 수도 캔버라는 새로 탄생된 도시이다. 계획도시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되겠다. 멜버른과 시드니가 한발씩 양보해서 만들어진 수도라 한다. 하지만 캔버라는 시드니에 치우쳐있다.

호주는 땅이 남한의 72배쯤 된다는데 인구는 2000만 정도이다. 인구가 4700-4800만인 남한의 절반이 채 안 된다. 그러니 가도 가도 평원만 보일 수밖에. 평원은 거의 목초지이다. 도로 가까이에 산이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소나무는 별로 없다. 어쩌다 소나무가 눈에 띄면 죽마고우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세 시간 반쯤 걸려 도착한 곳이 캔버라 시외버스 정류장. 시드니에서처럼 시외버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후 5시 가까이 도착했는데 웬걸 팔에 소름이 돋는다. 가로수의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걸 보니 완연한 가을이다.

택시를 타고 빅토리아 로찌라는 숙소 이름과 번지수를 댔다. 택시 기사가 위치를 되묻지 않는다는 건 로찌 숙소를 잘 안다는 뜻이다. 도로는 시드니보다 더 반듯반듯하다.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아 수도가 맞나하는 생각이 든다. 잠시 후 벌리 그린피스 호수를 지나치게 되면서 감탄사를 터트린다. 호수와 주변의 가을풍경이 마치 수채화 같다. 시드니에서는 볼 수 없던 광경이다. 호수 한 가운데서 해발 140미터를 자랑한다는 분수가 솟아오르고 있다. 뿌연 물줄기가 바람의 방향을 따라가고 있다. 호수를 따라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띈다.

빅토리아 로찌는 공동 숙소인데 민박의 개념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모텔의 명칭 아래 쓰인 글자는 bed and breakfast 이다. 잠자리와 아침 식사를 제공해 준다는 얘기인가보다. 창구에서 계산을 하고 홀에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아침 메뉴는 시리얼이다. 딸을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젊은 청년, 그는 대만인이다. 내 딸이 까무스레한 피부이니 동족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주변이 마을인데 공원처럼 꾸며져 있다.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뒤섞여 있다. 자세히 보니 단풍나무는 잎 모양이 다르다. 노랗게 물든 잎이 매달려있는 아름드리나무 또한 은행나무가 아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키가 큰 그 나무들은 전부 다 고목이다. 잎의 빛깔을 보니 가을의 절정기라는 느낌이 든다. 잔디밭은 이제 막 떨어지기 시작하는 잎으로 인해 푸른 빛깔과 빨간 빛깔, 노란 빛깔이 뒤섞여있다.

단풍을 보느라 나는 잠시 고향의 봄을 잊는다. 그러다 문득 4월에 가을을 맞이하는 호주 사람들은 쓸쓸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 연초이니 말이다.

마을을 돌아서나가니 상가가 나오고 음식점이 보인다. 우리는 호주에서 꼭 먹어보아야 한다는 케밥을 샀다. 실은 터키 음식이라 한다. 방망이로 얇게 밀어 익힌 빵 위에 우리가 고른 야채와 고기를 얹어준다. 환상적인 맛을 기대했는데 음식을 베어 물기도 전부터 얼굴이 찌푸려진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누린내. 그래도 식성이 좋은 나는 다 먹는다. 가을이라 해가 빨리 진다. 오면서 보니 도토리나무가 가로수이다. 씨알이 너무 굵어 줍고 싶지만 소용이 없으니 관둔다. 캔버라의 가을은 아름답지만 춥다. 종종 걸음을 쳐서 숙소로 돌아온다.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하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마치 내 자신이 호주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냉장고에 넣어 둔 과일 때문에 숙소의 식당으로 들어가니 젊은 청년들이 요리를 하고 있다. 요리솜씨는 좋은데 설거지 솜씨는 별로인지 그릇에서 비린내가 난다.

청년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었더니 컨츄리를 묻는다. 나는 사우스 코리아와 스몰 마운틴, 스몰 리버, 뷰티풀이라는 단어만 얘기한다. 청년은 일주일간 사우스 코리아를 여행했다는 얘기를 한다. 말이 안 통하니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무료로 차를 마실 수 있어서  홀의 의자에 앉았다. 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인사 외에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몇몇 사람은 대만, 영국, 프랑스인이고 그 외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딸과 얘기를 나누다 샤워를 하러 갔다. 공동으로 쓰는 샤워장이라 욕조가 있는 데도 샤워부스가 하나 더 있다. 욕조에 물을 받는데 딸이 혼낸다. 공동으로 쓰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단다.  받아쓰라고 욕조가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방에는 조그마한 온풍기가 매달려 있다. 그걸 켜 놓으니 냉기가 가신다. 시드니의 숙소보다 이불이 두꺼워서 좋다. 캔버라는 딱히 볼거리가 없단다. 국회 의사당과 국립 미술관을 돌아보자는 얘기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숙소 근처에서 버스를 탔다. 내려서 국회 의사당 옆문으로 들어갔다. 직원 하나가 딸에게 무어라 설명을 한다. 정문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피부가 동남아시아 사람처럼 검은 그 직원은 참 친절하다.

나와서 걷다보니 사거리이다. 딸이 왼쪽으로 가자한다. 몇 미터 더 가니 정문이 보인다. 정문 앞에는 레드 카펫이 깔려있다. 모래보다 좀 큰 자잘한 돌이 깔려 있는데 붉은 빛깔을 띠고 있어 레드카펫이라 부른단다.

국회가 열리는 날이 아니어서 발소리를 죽이고 다녀야 할 정도로 조용했다. 드나드는 사람들을 위해 곳곳에 의자가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위한 장소도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고 주변의 풍경까지 둘러봤다. 정말 깨끗하고 잘 정돈된 도시이다. 우리의 서울과는 전혀 다른 수도이다.

버스를 타고 너덧 정거장쯤에서 내리니 국립미술관이다. 기하학적의 구조물이 입구에서 우리를 맞았다. 일층 한쪽에는 불교와 관련된 작품들이 많아서 잠시 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림을 빼먹지 않고 보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3층이든가? 그곳에서 나이든 남자 둘이 구경하던 그림에 나도 눈을 붙인다. 1800년대의 그림이니 고전 작품이다. 다소 풍만한 여인이 그림의 주인공들이다. 남자는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그림을 보면서 뷰티풀이라는 감탄사를 흘린다. 나도 웃으면서 동조했다.

중간에 잭슨 폴락의 작품을 만나면서 내 얼굴은 환해졌다. 폴락이라는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한때 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폴락에게 매료되었었다. 어차피 폴락의 그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한참동안 그 그림을 쳐다보았다.

시드니 놀란의 작품이 많았는데 호주의 대표적인 작가인 것 같았다. 시드니 놀란은 1800년대 중반, 영국에 대항을 했던 전설적인 영웅 네드 켈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시드니 놀란의 많은 작품 속에는  네드 켈리가 형상화 되어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색채가 강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림도 어려웠지만 영어로 된 설명서가 붙어 있었으니 다른 화가들은 이름조차 기억에 담기 어려웠다고나 할까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한 시간이기도 하다).

다음날 일정은 시내를 멀리 돌아보는 일이다. 왔다갔다하느라 벌리 그린피스 호수 주변을 몇 번이나 돌았기 때문에 호수를 따로 보는 건 생략했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일찍 왔던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멜버른으로 떠나는 비행기 시간이 오후 세시였기 때문에 버스터미널에 짐을 맡기고 돌아다니기로 했었다. 그런데 짐은 이년 전까지만 맡기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쉽게 말하자면 이년 전까지는 그런 서비스가 있었는데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큰 짐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얘기가 되어버린 거다. 결국 시내를 돌아보는 걸 포기하고 천천히 시간 죽이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근처를 잠시 맴돌다 주변의 마이어 쇼핑센터로 갔다.  백화점이라서 물건이 비쌌기 때문에 윈도우쇼핑만 했다. 백화점 앞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들락거리는 사람을 쳐다보기도 했다. 지하 식당 코너에서 커피 한잔으로 시간을 좀 흘러보낸 후 진열된 음식을 구경했다.  우리는 일본 음식과 한국 음식, 중국 음식을 둘러보며 갈등하다가  중국 음식인 해물볶음밥을 골랐다. 시각적인 효과 때문인지 카레가 섞인 볶음밥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딸과 밥을 먹으면서 캔버라의 공항으로 일찍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캔버라의 공항은 규모가 작았다.  나는 일부러  밖으로 나와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쏟아지는 가을 햇살만 따갑게 느껴졌을 뿐 주변은 별 운치가 없었다. 실내에 들어와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한국으로 띄우는 엽서를 한 장 썼다.  

 설상가상이라고나 해야 할까. 멜버른 행 버진블루는 제 시간보다 늦게 왔다. 여행 와서 가장 지루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