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홉킨스는 뛰어난 연기자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맨 처음 마주쳤던 영화가 ‘남아있는 나날’이다.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을 통해서였다. 비록 집사라는 하찮은 직업을 가진 남자였지만 나는 그날부터 안소니 홉킨스에게 빠져버렸다. 핸섬한 외모가 아닌 그를 사모하게 된 이유는 완벽한 연기력과 점잖은 외모 때문이었다. 20대 때 나는 태양을 가득히, 라는 영화를 통해 알랑들롱을 한동안 사모하기도 했는데 나도 나이가 들면서 남자를 보는 안목이 달라졌던 것이다. 게다가 4-5년 전쯤 한국을 방문했던 알랑들롱의 의치를 보는 순간 그의 매력은 에누리처럼 사정없이 깎여 버렸다.

안토니 홉킨스는 진지한 역할도 잘 해냈지만 한니발이나 양들의 침묵에서 했던 살인마의 연기 또한 흠 잡을 데가 없다. 안소니 홉킨스는 폭 넓은 연기력으로 사랑을 받는 배우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타고난 끼와 부단한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이겠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안토니 홉킨스가 집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보다 더 집사답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안토니 홉킨스가 집사로 근무하는 달링턴 가는 오래된 성이다. 거기의 주인인 달링턴은 영국의 정치가이며 나치 주의자이다.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는 달링턴 가의 집사이다. 스티븐스의 주인인 달링턴은 성품이 온화하고 인격적이기도 하다. 스티븐스는 그런 주인을 정성을 다해 섬긴다.

달링턴 가에서는 세계 각국 정계의 거물들이 간혹 모임을 갖는다. 스티븐스는 그런 모임의 시중을 들어야하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 있지만,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말을 함구한다. 그의 직분은 집사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는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느라 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한다. 당시 아버지는 일하는 곳에서 가까운 방에 있었다.

영화는 달링턴 가를 통해 이차 세계 대전 전 후의 격변기를 보여주고 있다. 달링턴은 나치의 패망과 함께 반역자가 되고 저택의 소유주가 미국인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스티븐스는 여전히 집사 직분을 지킨다. 세월이 흘러 스티븐슨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 되었다. 젊었을 때와는 달리 그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독신이다.

그 무렵 스티븐스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이십 년 전에 헤어진 캔톤(엠마 왓슨)이라는 여자에게서 온 편지이다. 주소를 들고 그녀를 찾아가는 동안 스티븐스는 달링턴 가의 시절을 회상한다.

미스 캔톤은 다소 차가운 스티븐슨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한 여자였다. 캔톤은 가끔 스티븐이 사용하는 테이블의 화병에 꽃을 꽂아주고 항상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스티븐스는 열쇠구멍 같은 곳을 통해 캔톤을 바라보곤 했지만 감정은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어느 정도 감지를 한 캔톤이 어느날 스티븐슨의 마음을 떠보는 말을 한다. 스티븐슨은 사무적인 말만 할 뿐 캔톤의 질문에 코멘트를 하지 않는다. 그 장면에서 나는 스티븐슨이  마치  화실의 석고상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캔톤은 반발심에서 제프리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스티븐슨은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고 결국 캔톤은 결혼을 해서 떠난다. 떠날 때 캔톤은 스티븐슨이 드러내지 못하던 그 감정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캔톤과 스티븐스는 다시 만나는 그 순간까지도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만 헤어질 수 밖에 없다. 집사의 직분에 충실하느라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던 남자가,  여자를 취하기 위해 한 가정을 어떻게  깰 수 있으랴.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노년의 남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이별을 해야하는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렵다.

한 집사를 통해 격변기를 이야기하고 철저히 감정이 절제된 사랑을 그려낸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작품으로는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반가운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슈퍼맨으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의 건강할 때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달링턴의 조카로 출연하는 휴 그랜트이다. 조연으로 나오는 휴 그랜트의 지질한 모습에 영화를 보는 당신은 웃음을 터트리기도 할 것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은 안소니 홉킨스의 절제하는 감정 연기가 압권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