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의 지도에 난 길은 웬만하면 끝이 바다이다. 동쪽으로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만 반도 모양이라서 주변이 거의 바다인 셈이다. 3년 전에 한 달 정도 머문 밴쿠버지만 아직도 복잡한 곳엔 혼자서 가지 못한다. 딸은 내가 길을 잃어버릴까봐 휴대폰에 구글 지도를 깔아주었다.

오늘은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딸을 따라나섰다. 딸이 요가를 할 거라면서 그동안 캐나다플레이스든 어디든 다녀오면 된다고 말했다. 캐나다플레이스는 솔직히 5번도 더 가본 곳이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나 마시겠다고 했다. 라지는 너무 커서 다 마시지 못할 것 같고 스몰은 딸을 기다리는 시간에 비해 양이 너무 적을 것 같았다.

나는 딸에게 중간 크기의 커피를 주문하겠다고 하면서 딸이 가르쳐 주는대로 발음 연습을 했다. 딸하고 발음이 사뭇 다르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주문하려고 줄선 사람들 뒤에 섰다.

“원 미디움 마일드 플리즈.”

딸이 가르쳐 준대로 발음을 했다. 써버가 나와 딸을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뒤로 물러났고 딸이 앞으로 나와 몇 마디를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컵에 커피를 담아왔다. 커피를 들고 나오면서 딸에게 물어보니 그 청년이 다른 커피를 권했단다. 직업정신이 투철한 그 청년이 나의 의지를 여지없이 꺾어버린 것이다. 앞으로도 혼자 커피숍에 가는 게 어려울 것 같다고 딸에게 말하니, 딸이 웃으면서 번역기에 쓰인 글자를 보여주라고 한다.

스타벅스 앞쪽으로 야외 테이블이 대여섯 개 정도 놓여 있었다. 나는 빈 자리에 앉았다. 어제 내린 비로 날씨가 추운 편이었다. 뚜껑이 있는 커피는 빨리 식지 않기 때문에 가끔 한 모금씩 마셔줘서 몸이 식는 걸 막았다. 생각해보니 한국은 무지막지 더운 봄이었는데 밴쿠버에는 봄이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하늘에는 구름이 많다. 워낙 비가 잦은 곳이라 비가 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캐네디언들은 비 맞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나는 절대 그렇지가 못하다. 특히 머리가 젖는 건 참을 수가 없다. 빗물이 머리카락에서 몸으로 흘러들 때의 기분은 상상조차도 싫다.

건너편의 남자가 들고 있는 노트와 종이뭉치도 비가 온다면 아예 못 쓰게 되는 게 아닐까싶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도 작가인가? 그는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다. 나는 검정색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남자를 힐끔 거렸다.

원고처럼 보이는 종이 무더기와 써내려가는 노트 한권. 보통사람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써내려간다. 왼손잡이들의 특징이긴 하지만 내겐 기묘한 모습이다. 미간의 주름이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건 생각을 굴린다는 뜻일 게다. 물론 그가 건물의 외벽만을 더듬고 있는지 아니면 도로나 하늘 따위도 스케치하는 중인지 아니면 과거 잠깐 알았던 한 여인을 끌고 와서 입맞춤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남자의 상상이 무엇이든 내겐 흥미롭다.

남자의 그런저런 모습을 놓칠 수가 없어서 나도 휴대폰을 들었다. 메모 창을 열고 장님 코끼리 더듬듯 자음과 모음을 눌렀다. 돋보기가 없어 엉뚱한 글자가 만들어 지곤 한다. 너덧 줄이나 썼을까? 그의 시선이 내 테이블로 옮겨오는 바람에 나는 커피를 집어들었다. 

                                                 -모여 있는  시위대-               

마침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도로 건너의 보도 위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오십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노란 깃발이 매달린 피켓을 들고 있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에 그들을 담았다. 피켓에 쓰인 글자가 간략해서 그들의 불만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남자는 글에 꽤나 집중하는 모습이다. 원고는 에이포 용지 20-30매씩 예닐곱 묶음. 단편을 하나하나씩 완성해서 장편으로 만드는 중인가? 그는 가끔씩 다른 원고를 들추고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 남자의 두툼한 원고더미가 너무 부럽다. 나는 언제쯤 1000매나 2000매 쯤 되는 장편을 만들 수 있을까?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자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커피는 마시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던 듯 테이블에는 단순한 스타일의 가방만 놓여 있을 뿐이다. 내가 여자를 쳐다보는 중간에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고 여자는 후다닥 받았다. 언성을 높이던 여자는 엉덩이로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여자는 긴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잰 걸음으로 가버렸다.

그 여자가 사라진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딸을 발견했다. 벌써 한 시간이 흘렀나보다. 횡단보도 앞에 선 딸은 반갑다는 듯 팔을 흔들었다. 나는 허리가 뻐근했기 때문에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