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다녔다. 서울의 서쪽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쪽으로 움직이기가 좋았다. 공항을 지나 갈라지는 길에서 핸들을 왼쪽으로 틀면 김포였고 오른쪽으로 틀면 일산이었다. 김포는 꼭 지나쳐야만 하는 곳이었지만 볼 게 없어서 중간에 하차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문사는 강화도 앞의 섬 석모도에 있기 때문에 배를 타야만 한다. 배는 수시로 다니며 차와 함께 타게 되어있다. 보문사에서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  바위에 새겨진 마애관세음보살 좌상이 나오는데  실은 1928년도 작품이라 한다. 거기에 올라가면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보문사는 신라시대 때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남편과 상태가 좋지 않았을 때 나는 김포로 이사를 했고 그곳의 영어 선생들과 어울렸다. 둘다 미혼이었으며 얼굴이 안 생긴 편이었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  ㅈ선생은 당시 55살 먹은 노처녀였는데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ㅊ선생은 만삭인 몸이었다. ㅊ선생의 몸엔 아이 대신 지방덩어리가 뭉쳐 있었다. ㅊ선생은 나와 또래였는데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져서 동남아계의 근사한 남자를 애인으로 두기도 했다. 이혼녀이니 어떤 남자인들 어떠랴.

김포에서는 강화도가 가까웠기 때문에 맘이 맞으면 그쪽으로 움직이곤 했다. 그날은 다른 데를 들리지 않고 보문사까지 갔었을 것이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나뭇잎이 연록빛을 띠고 있었으니 오월 말쯤 되었던 것 같다.

만삭인 ㅊ선생은 눈이 밝았다. 승용차에서 내려 어슬렁대고 있던 그녀가 나무그늘 밑을 가리켰다. 화단을 둘러친 벽돌 위에 앉아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방인이었다. 거리가 좀 있어서 미남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이는 들어 보였다. ㅊ선생이 싱글거리더니 (예쁜) 내가 가서 말을 걸라는 얘기였다, 그러마고 할 수는 없었다. 영어선생들과 어울렸지만 나는 영어에는 잼병이었으니까. 결국 나는 ㅊ선생을 들러리로 세우고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나는 '헬로우'라고 하면서 씩 웃어보였다. 이병헌이처럼 살인미소를 보냈던 것이다. 그 다음의 대화는 ㅊ 선생이 이어갔다. 모 대학의 교환교수로 와 있다는 그 남자 또한 영어회화에 그리 능통한 건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 출신의 남자였다. 곱슬머리에 약간 차가운 표정처럼  말이 많지는 않았다. 미소를 지을 때는 묘한 표정이 되기도 했다. 바람둥이 같은 느낌이랄까. 의도대로 그는  우리에게 납치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보문사를 둘러보고  강화산성을 갔던 것 같았는데 아마 그의 계획에는 차질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강화도를 다 둘러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여자가 끼면 되는 일이 없다든가?)

오는 길에 딸에게 전화를 걸어 집을 치우라고 했다. 음식을 만질 줄 아는 사람 또한 나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창가에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김포는 아파트 단지가 자리를 잡으면서 기묘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몇 가지 음식과 맥주가 전부였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에게는 한국에 몇 명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메일주소를 주고받았다.

메일 주소는 받았지만 ㅈ선생에게 전담시켰다. 그 남자를 바라보던 ㅈ 선생의 표정이 여느날과는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ㅈ선생보다 서너살 아래였다.

ㅈ선생의 목소리는 고왔지만 도수가 높은 안경 때문에 거의 눈을 감고 있는 수준이었다. 나는 ㅈ선생을 쳐다볼 때마다 눈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대여섯 살 된 손자를 두었을 거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 선생은 안경에 들어있는 도수보다 훨씬 높은 눈높이를 갖고 있었다.)

한강 고수부지에 자리한 여의도 선착장에서 만나기로 한건  ㅈ 선생이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ㅈ 선생은 그 약속을 받아낼 때까지 줄곧 들떠 있었다. 약속 날 아침에 나는 김밥을 쌌다.

여의나루역에서 내려 고수부지를 가로질러 갔다. 잔디는 듬성듬성 흙을 내보이고 있었지만  제법 새파랬다. 그들은 벌써 유람선 매표소 앞에 서 있었다. 그쪽은 남자 셋에 여자 한명이었고, 우리는 여자가 셋이니 짝은 그런대로 맞는 셈이었다.

그들 틈에 낀 여자는 구릿빛 피부에 눈이 하늘색에 가까웠다. 뚱뚱하면서도 귀여운 얼굴이었다.  키가 큰 남자는 허리를 벨트로 꽉 조여맸는데 한눈에도 단단한 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중 젊은 남자는 몸이 너무 비대했다. ㅈ선생이나 ㅊ선생 그리고 나의 시선은 늘 그 남자를 피해 다니곤 했다. 만삭인 ㅊ선생을 바라보는 그 남자의 표정도 다소 냉소적이니 피장파장인 것 같았다.

고수부지 가장자리에 자리한 나무의자에서 우리는 김밥을 먹었다. 나는 김밥을 굵게 싸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들의 입에는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김밥을 먹던 그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탱큐라는 말을 했다.

배삯은 개인당 80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오년 전쯤이라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상당한 액수였다. 러시아는 한국과 환율이 다르니 그들은 나보다 더 놀랬으리라. 표는 그들이 끊었으니까.  자동차로 도심을 다니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긴 했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자 기억에 남는 건 아파트 숲 뿐이었다. 서울도 언제부턴가 홍콩처럼 삭막한 도시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에서 내려 영등포로 방향을 잡았던 것은 다양한 먹을거리 때문이었다. 기웃거리다가 와인 삼겹살집으로 들어갔다. 인테리어는 깨끗한데 손님이 없어 물어보니 개업한지 며칠이 안됐다는 말이었다. 하긴 영등포는 밤이나 되어야 북적거린다. 나이트클럽의 샹들리에가 지루박에 맞춰 돌아가고 여자들의 치맛자락은 샹들리에를 따라 돌아간다. 석별의 정이 흘러나올 때쯤 근처 여관으로 스며드는 악극단의 여배우 같은 여자와 핸섬한 남자들... 얘기가 옆길로 샜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다. 광대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열기가 사그라질 수밖에...간혹 허리를 벨트로 조인 남자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면 나는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우리팀이 계산을 했다. 커피숍으로 갈까하다 갑자기 공원으로 가자는 말이 나왔다. 좋은 생각 같았지만 오산이었다. 공원의 의자에 줄줄이 늘어앉아 있다보니 영 어색했다. 그틈에 허리를 벨트로 조인 남자가 내게  메일주소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메일주소를 받아들면서 울상을 지었지만 두 선생들은 모르는 척 했다. 결국 내가 일을 떠맡은 셈이었다.

메일을 한번 썼고 한번 답장을 받았다. 답장에는 다음 미팅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나는 두 선생들에게 그날은 비워두라고 말했다. 약속이 있는 눈치였지만 말이 잘 안통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시 온 답장에는 사정상 계획을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 메일은 약속 전날 밤 늦은 시간에 내게 도착했다.

나는 답장을 썼다. I don,t understand.

***내 결정적인 단점은 좋지 않은 상황일 때 까다로움을 피운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가 영어 실력이 있었다해도 그렇게 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