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우리를 깨우는 건 새소리와 여자들의 목소리. 소리를 따라 창을 여니 비둘기와 이름 모를 새가 걸터앉은 나무가 보인다. 숙소 주변 공터에 서너 사람이 일을 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손에도 괭이가 들려있다. 여자들은 괭이질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주절댄다. 하수관 따위를 묻기 위해 도랑을 파는 것 같다. 그나마 기온이 낮은 계절이라 낫기는 하겠지만, 여자들이 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지난밤에는 덥지 않아서 에어컨을 끄고 잤었다. 검색을 해보니 각 도시마다 기온의 차이가 꽤 크다. 아유타야보다 수코타이가 조금 덜 덥고 치앙마이는 온도가 더 낮다. 딸은 숙소에서 틀던 에어컨 때문에 감기에 걸려 콧물을 줄줄 흘리는 중이니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잘 수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밥을 먹기 위해 유리창을 닫고 에어컨을 켰다. 기차의 일등실에서 받아온 밥과 찌개를 전자렌즈에 데웠다. 고등어찌개와 닭볶음요리가 입에 잘 맞아 맛있게 먹었다.

수코타이의 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 나오는데 장이 서 있다. 깜짝세일처럼 아침에만 서는 장이란다. 땡땡이 반바지를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가 입었다. 하지만 그날은 옷차림과 신발 때문에 딸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은 날이다.

쑥색 티에 땡땡이 바지, 분홍색의 신발 조합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란다. 딸은 내 옆구리 살이 고무줄 바지에 의해 불룩 튀어나와서 더더욱 짜증이 났단다. 아무래도 사 입은 바지의 고무줄이 허리 26인치 정도에 맞춰진 것 같다. 계속 짜증스럽게 굴어서 한마디 했다. 왜 내게 그러느냐고 말이다.

도로변으로 나오니 멀리서 한 남자가 손짓을 하면서 뛰어온다. 그는 쏭태우 기사인데 차에 여행객을 태우고 역사박물관으로 가는 길이란다. 핏사눌록에서 함께 버스를 탔던 커플이 이미 차에 올라 있다. 솔직히 어디서 차를 타나 헤매던 길이기도 해서 그 기사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신도시이고 역사박물관은 구 도시에 있다. 역사박물관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시골스럽게 변한다.

수코타이의 가장 큰 유적지인 역사공원은 흩어져있는 벽돌들을 주워 모아서 원래대로 복원했다한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규모가 워낙 커서 온종일 다녀도 전체 관람이 어렵다한다. 입장료는 100밧. 자전거도 40밧 정도면 빌려 탈 수 있는데 난 탈 줄 모른다. 어차피 딸도 걷는 게 건강에 좋으니 열심히 걷기로 했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자전거 떼와 만났다. 등에 Bike for dad 라는 글귀가 쓰인 노란 추리닝을 입은 남자들이다. 여기에서 아버지란 왕을 뜻한다고 한다. 12월 5일이 왕의 생일인데 축하하는 의미로 미리 자전거행사가 열렸던 모양이었다. 그날은 식당이든 술집이든 술을 팔지 못하게 되어있단다. 곧 자전거 부대는 밖으로 빠져 나갔고 자전거가 없는 사람들은 공원의 한쪽에 남았다.

공원의 유적은 띄엄띄엄 있었고 각기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우리는 돌탑과 주변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은 다음 다른 유적으로 걸음을 옮기곤 했다. 자세히 보니 아유타야의 탑과는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다른 부분이 많다. 수코타이가 1238년에 세워졌다하니 1350년에 세워진 아유타야가 수코타이 유적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수코타이는 1448년 아유타야에 정복되었으니 200여년 정도의 짧은 역사이다. 그 기간에 비해서는 대단한 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완전하게 건물 모양을 갖춘 유적과 중간 중간 기둥만 세워져있는 유적들. 세워져있는 기둥들은 크기가 일정하기 않다. 유실된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모양인지 알 수는 없다.

유적 사이사이에 연못과 호수가 있고 주변에는 야자수들과 이름을 알지 못하는 고목들도 있다. 하나의 유적지를 지나치면 또 하나의 유적이 기다리고 있다.

아는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우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수코타이로 여행 온 서양 커플이다. 딸이 내게 묻는다. 언제 다 도냐고. 자전거를 잘 타는 딸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들이 부러운가 보다. 한낮이라 볕이 따가우니 나는 죄인 같은 심정이 된다. 게다 딸은 감기 때문에 목까지 아프다고 한다. 내 옷 가지고 신경질 냈던 것도 감기 때문이라고 실토를 한다.

내가 감기에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랄 수 있는데 상황이 녹록치 않다. 나도 벌써부터 오래 걸으면 피곤하니 말이다. 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돌아 갈 때는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린다하니 걱정이다. 딸이 노트북으로 항공권을 알아봤는데 헉 소리가 났었다. 항공기표가 한 사람당 십 만 원이 넘는단다. 그러니 열세시간 동안 기차를 타야만 한다. 야간 침대열차는 이미 동이 나서 예매하지 못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진을 찍던 중 스님이 렌즈에 잡혔다. 자세히 보니 스님들이 유적지 사이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여 있다. 가까이 가서보니 일반인들도 섞여있다. 스님들은 전부 맨발이다. 스님 일부는 다리를 건너오는데 각자 스텐 요강(?) 하나씩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그게 밥그릇이었다는 것은 행사가 있던 장소에 가서야 알았다. 그들은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옆구리에 낀 밥그릇을 우리네는 요강으로 쓴다하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일반인들이 밥과 반찬을 퍼서 스님들에게 나눠주고 있는데 마치 소풍 분위기가 난다. 이미 밥을 받은 스님들은 공터 여기저기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동참하고 싶지만 아무도 밥 먹고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아 섭섭하다.   

개울을 따라 올라오니 스님들이 머물렀던  텐트가 있고 주황색 천이 줄에 널려있다.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는 주황색 천은 승복이다. 그 커다란 천으로 몸을 감싼 다음 마지막에 돌돌 말아서 어깨에 두르면 옷이 된다. 그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힐끔거리다보니 앳된 소년도 눈에 띈다. 그곳을 지나치고 조금 더 걷다보니 도로가 나온다.

도로 너머에도 유적이 있지만 그만 가기로 한다. 뚝뚝으로 돌았다면 전부 다 관람하고도 시간이 남았을 것 같다. 운동 삼아 걷기도 했지만 실은 돈을 아끼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세 시간 정도 걸었으니 피곤하기도 하고 점심시간도 벗어나서 배가 고프다. 유적지 주변에는 음료수와 커피 파는 가게 밖에 없다. 딸을 보니 감기약도 사야할 것 같다. 우리는 출구 앞에 세워져있는 쏭태우를 탔다.

아침에 차를 탔던 곳에서 하차를 했다. 먼저 약국을 들러야하기 때문에 약국부터 찾았다. 다리를 건너가는데 길거리 음식점들이 곳곳에 있다.  야시장이 열리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오픈을 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약국은 다운타운에 있었다. 약국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육십 대 초반의 여성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영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분인데도 알아듣는 건 그리 어렵지 않나보다. 6개들이 알약이 10밧. 우리 돈으로 340원이니 참 싸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은 레스토랑으로 가서 먹었다. 손님이라고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 한분과 우리뿐. 똠양꿍을 시켰는데 그릇만 고급스럽지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이 나이에도 양이 많은 걸 선호한다. 옆구리와 뱃살을 무척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말이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메뉴 책자에 팁 20밧을 꽂아주니 바텐더인지 사장인지 모를 그 젊은 남자의 얼굴이 밝아진다.

점심 후 숙소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감기약을 먹었던 딸은 곧 잠에 빠진다. 아직까지 밖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재잘거림. 인부들은 남자 셋 여자 둘인데 남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오후 8시 반쯤 저녁을 먹기 위해 숙소에서 다시 나왔다. 큰 도로변으로 나오자 못 보던 음식점들이 길거리를 점유하고 있었다. 사람이 많은 가게로 다가갔다. 삶은 오리가 걸린 좌대가 보이고 베어낸 오리고기를 중년여인이 썰고 있다. 하얀 수건을 두른 중년남자는 고기를 담은 그릇에 국수를 넣는다.

딸로 보이는 젊은 여자는 설거지를 하고, 아들로 보이는 초등생이 손님들에게 국수를 가져다준다. 부부의 얼굴을 보니 늦둥이인가 보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사람이 눈에 띄는 걸 보니 퇴근 후 곧장 온 것 같다. 오리고기라 역한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가격은 50밧이고 양도 얼마 되지 않아서 두 그릇씩 먹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야시장에 가야하니 각자 한 그릇씩 먹었다.

야시장은 그곳에서 오 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있었다. 밴드가 왔는지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음악소리부터 들린다. 사람들을 따라서 안쪽으로 걸어가면서 이것저것 구경을 했다. 우리는 어묵 꽂이와 돼지고기, 닭고기 꽂이를 샀고 튀김만두도 샀다. 잘라서 봉지에 담아 파는 망고를 샀는데 맛이 시큼하다. 망고도 바나나처럼 껍질이 좀 지저분해져야 당도가 높은데, 특히 만졌을 때 말캉한 느낌이 들어야한다.

애완용 동물을 파는 곳을 지나니 옷 가게가 죽 늘어서 있다. 더러 진열된 옷 위에 파라솔이 씌워져 있기도 하다. 음식점들과는 달리 옷가게는 썰렁한 분위기이다. 술을 파는 데가 없어서 재미가 덜한 것 같다. 밴드의 노랫소리는 우리가 그 시장을 벗어 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이튿날은 숙소인 블루하우스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서양식의 아침식사가 그립다는 딸아이의 뜻에 따른 것이다. 슬라이스 햄과 계란프라이, 토마토 조각, 호밀식빵. 결코 내가 선호하는 음식은 아니다.

밖으로 나올 때 자전거를 탄 한 노인이 가는 길을 가르쳐준다. 지름길인가 싶기는 한데 영 불안하다. 표를 미리 끊어놓은 게 아니니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자면서 강을 따라 걸었다. 주변이 좀 생경한 풍경인데 그래서 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계속 걷는데 좀 불안해서 평상에 앉아있는 아줌마들에게 물었다. 어차피 영어를 알아들을 것 같지 않으니 수코타이 터미널이라고만 묻는다. 그들이 가리키는 골목을 들여다보는데 영 마뜩찮다. 집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샛길. 막다른 집을 향한 길이 아닐까싶다.

일단 휘휘 둘러보는데 마침 나무에 매달린 이정표 하나가 눈에 띈다. 누군가가 갈겨쓴 수코타이 버스터미널이 읽힌다. 한참 걷다보니 공터가 나타나고 뚝뚝과 쏭태우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게 보인다. 바로 그 앞이 터미널이다.

수코타이의 버스터미널은 한가롭다. 텔레비전에서 잘생긴 남자배우를 볼 수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텔레비전에 자막처럼 적힌 시간이 안 맞다. 터미널인데 이 십 여분씩이나 늦게 설정되어 있다니 이건 아니다 싶다. 솔직히 한국에서라면 매표창구에 가서 얘기를 했겠지만 말이 잘 안 통하는 외국이니 관심을 끄기로 한다.

우리는 치앙마이로 가는 12시행 버스표를 끊었다. 장장 6시간이 걸린다는 버스는 시간보다 늦게 왔다. 늦게 왔어도 기분이 좋았던 건 2층 버스였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자 딸은 약 탓인지 졸았고 나는 줄곧 창밖을 봤다. 도로가 조금씩 높아지고 산이 나타났다. 줄곧 지나치는 산을 보는데 잎이 물들어 있는 게 눈에 띈다. 우리나라로 말 할 것 같으면 풍경이 9월 중순 정도의 느낌이랄까.

시계를 보니 거의 7시. 치앙마이 입구에 들어서는데 버스의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창을 통해서 보는데 불빛이 가득한 사원이 도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치앙마이의 첫인상은 깨끗하면서도 화려하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