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짧아지면서부터 사람들은 우울해진다고 한다.  겨울철이면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연인들이여 절대 겨울에는 이별을 하지 말라!  이별 후 긴 밤을 홀로 지낼 생각을 해보면 아마 이해가 갈 것이다.  내 생각에는 해가 서산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하지쯤에 이별을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사랑에 어설픈 내가 할 수 있는 충고인가?

  요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갇혀 지내면서 수만 갈래로 뻗친 생각의 타래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사람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물론 이런 혼돈을 걷어낼 수 있는 방편이 없는 건 아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사람들과 얘기하기, 방안에서 디스코 추기...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약간의 기분전환만 가져다주지 소득을 기대하는 내 성격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 끝에 사주공부를 시작했다.  그동안 주욱 했었다는 게 옳은 표현이다(지지부진했지만).  가난에 시달리다보니 그걸 생활의 방편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다.  또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니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건 역시 영화보기이다.  아마 겨울에 들면서 60-70편의 영화를 보았지 싶다.   글쓰기가 싫어 영화평은 생략했었다.  어제는 영화를 본 후 평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아니 영화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이제 곧  소설쓰기에 들어갈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히로시마 내 사랑'.  흑백영화이다.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를 배경으로 삼았으며 주제는 사랑 또는 사랑의 상처이다.

  프랑스 여배우가 일본에 촬영을 와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남자의 부모는 히로시마 원폭의 희생자이다. 여배우는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데 거기에 출연중이다.  그들은 바에서 만났고 곧바로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욕망과 전쟁의 함수관계...  자칫 억지 설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여배우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  이차대전 당시 스물이 채 되기 전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고향에서 독일군 병사와 사랑에 빠졌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적군과 나누던 섹스.  위태로웠던 그들의 사랑은 결국 독일병사가 죽음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싸늘하게 식어가던 연인의 몸을 끌어안고 밤을 샜던 여자.  그길로 여자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지하실에 감금된 채 손톱으로 벽을 긁어대면서 연인의 이름을 불러대던 여자.  여자의 뇌리는 백지상태나 다름없지만 그 안에 연인만은 늘 존재한다. 

  히로시마의 남자와 프랑스의 여배우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랑은 탐닉에 가깝다.  그들은 갈등을 하지만 유부남 유부녀이기에 이별을 해야만 한다.  이별을 할 시간이 가까워올 수록 화면의 흐름은 점점 느려진다.  내 머릿속에는 한 컷씩 찍은 스냅사진으로 남는다.  흑백영화이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1959년 작품이니 아름답던 여배우는 지금쯤?  영화가 끝나자 나는 여배우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