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의 창작마당 > 산문모음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종점인 버스는 벌써 다섯 대째 왔다. 볕이 뜨겁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시간은 무릎을 굳어버리게 한다. 게다가 정류장에 세워둔 승용차가 장애물이 지나기만 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불안하기까지 하다. 도난방지 장치라는 게 때론 애먼 사람을 잡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도 어상천으로 갈 버스는 오지 않는다.
   드디어 차가 왔다. 오르자마자 "아저씨 배차 간격이 어떻게 되요?" 라는 질문을 던진다. 기사 아저씨는 우선 자리에 앉으라고 한다. 그러더니 내게 말을 건넨다. "제천 분 아니세요?" 아직 나는 제천 말을 쓰지 않으니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도시 분들의 개념으론 이해되기가 어렵겠지만..."
   미리 시간을 알고 오면 다리가 고생을 하지 않는단다. 한 시간 반 간격의 배차... 기다리기엔 정말 징그러운 시간이다. 종점까지 가는데 30분 정도인데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길다니...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있는 나로서는 못 마땅하다. 그러나 차가 도로를 달리는 내내 정류장에는 사람이 없다. 내 무릎을 저리게 했던 배차 간격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
   내가 차에 올랐을 때 손님이 세 명, 그리고 중간에 탄 사람은 나하고 어떤 아줌마 한사람뿐이다. 후하게 쳐서 열 사람이 그 차를 이용했다 하더라도 8500원 밖에 안 된다. 게다가 그 차는 간혹 버스 폭과 맞먹는 좁은 도로를 위태롭게 달리기도 한다. 앞자리에 앉은 나는 차바퀴가 도로를 벗어날 것만 같아 가슴을 졸이곤 했다.
   드디어 차가 첩첩 산중으로 들어선다. 나는 감탄사를 흘리며 눈을 빛낸다. 기사 아저씨는 나를 보면서 어지간히 철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종점에서 내려 30여분 남짓 걸어 내려오다가 그 할머니를 만났다. 나는 좌측 도로변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마치 버스를 타기 위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가까이 가자 할머니가 말을 걸면서 내 손을 잡는다.
   "너무 심심해서..." 서두를 그렇게 꺼내는 할머니의 얼굴은 세월이 젊음을 앗아가 버려 주름투성이다. 저승세계와 맞닿아 있는 듯한 눈동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할머니의 말을 마냥 듣고 있다. 할머니는 나더러 길 건너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하신다. 어차피 나는 깊은 골짜기와 높다란 산과 한가로운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왔던 터이므로 할머니를 따라갔다. 물론 약간 망설이기는 했다.
   할머니는 나더러 식사를 했느냐고 물으신다. 실은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점심과 더불어 술을 마실 수 있는 집을 찾고 있었다. 나는 괜찮습니다,라고 하면서도 밥은 먹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양할 줄 모르는 게 미덕이 아니라는 생각이 잠깐 스친다. 할머니는 아침부터 놓아두었던 상에 밥을 한 그릇 퍼다 놓고 냉장고에서 몇 가지 반찬을 더 꺼내다 주신다.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을 정직하게 할만큼 나는 밥을 맛있게 먹었다.
   할머니가 밖을 내다보시더니 버스가 나간다며 어쩌나 하신다. 다음 차를 타면 되니 걱정 말라고 말씀드리고 할머니와 함께 밖으로 나온다. 옆의 구멍가게에서 부라보콘을 사다 할머니께 드리고 나도 먹었다. 틀니인 할머니에게 사드릴 만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할머니는 저녁밥을 안친다고 잠깐 들어가시고 나는 마을 앞의 저수지를 돌았다. 시멘트 광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회색 빛 물이 흘러들고 있었는데 낚시꾼도 보인다. 흘러드는 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일고 있다.
   저수지에서 마을 쪽으로 다시 돌아 나오는데 할머니가 도로변에서 허둥대고 계신다. 나를 찾으시는 게다. 내가 할머니를 부르면서 가까이 가니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반색을 하신다. 그 중간에 낮술에 얼굴이 벌건 일행과 마주친다. 한 여자는 얼굴이 꼭 맨드라미 빛깔이다. 맨드라미라는 내 표현에 여자가 거울을 꺼내어 보면서 픽 웃는다. 그 웃음이 여자의 얼굴빛을 더욱 붉게 만든다.
   드디어 할머니네 가족이 왔다. 직장에 다닌다는 손녀딸이 승용차에서 내린다. 그 틈에 나는 할머니와 헤어진다.
   정류장에 서 있으니 차츰 사위가 어두워진다. 어두움은 마음을 허허롭게 한다. 가족이 일을 나가고 없는 잠깐 사이에도 그 할머니는 외로운 것이다. 나도 그렇게 될까...어둠에 가라앉은 산과 마을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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