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도로의 신호등이 모텔 앞에 서 있었는데 밤 내내 따르륵거렸다. 청각장애인을 위해 내는 소리였다. 새벽에 깨어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신호등이 바뀌는 시간이 지나치게 짧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깐 여주인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쳐버릴 수 있을 정도의 아주 미세한 소리였다. 문을 여는 소리인지 문을 닫는 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9시가 넘어 일어난 우리는 냉장고를 열어 오렌지주스를 꺼내고 커피도 끓였다. 복도의 테이블에 놓인 바구니에 너덧 개의 빵이 담겨 있었다. 어제 보지 못한 것이니 우리가 자는 사이에 준비해놓은 것 같았다. 마치 우렁각시가 왔다 간 것처럼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일회용 쨈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어서 빵에 발라 먹었다. 밥을 먹은 후 침대를 대충 정돈하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카페에 들어가니 손님이 꽤 있었다. 모닝커피를 마시러 온 사람들 같았다. 잠깐 서 있었지만 주인의 얼굴은 볼 수 없었고, 손님이 점점 늘었기 때문에 종업원의 손에 열쇠를 쥐어주고 나왔다. 

어느 틈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밴쿠버보다 비가 더 잦은 곳인 것 같았다. 터미널은 빌딩의 일층에 있었고 여느 사무실과 모양새가 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차고가 없는 터미널인 셈이었다. 표를 끊고 기다리고 있자니 버스 한 대가 와서 도로 가장자리에 섰다.

낡은 그레이하운드였는데 꽁무니에 택배용 컨테이너를 매달고 있었다. 여러 도시를 거쳐 갈 것이고 정류장마다 여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중간에 차를 갈아타기는 하지만 밤늦게까지 탈 버스이다보니 낡았단 생각에 얼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우리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빗속에 줄을 섰다.

밴쿠버의 승객들과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 차림새의 승객들이었다. 노동자차림의 한 남자가 뚱뚱한 처녀와 함께 차에 올랐다. 남자는 앞니가 세모꼴로 잘려나갔음에도 입을 가리지 않고 웃곤 했다. 그들을 본 순간 나는 정상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 그런 선입견이야말로 내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단점 중 하나였다. 나누는 대화나 행동으로 미뤄보건데 그들은 극히 정상이었다.

한 가족은 이십대 중반의 여자와 할머니, 꼬마여아가 구성원이었다. 아이는 여자의 품에 안겨서 생글거리고 있었다.그들이 어디에 앉았나 돌아보았는데 거의 맨 뒷자리였다. 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귀를 기울였다. 그들도 우리처럼 밴쿠버까지 갔는데 아이의 울음소리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차는 대부분의 소도시에서 정차를 했다. 가끔 기사가 물건을 들고 어디론가 가곤 했는데, 기사가 직접 택배사무실을 들르는 것 같았다.  스미더스에서는 40분 정도 정류장에서 멈춰있었기 때문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과자도 샀다.

 그 편의점은  공간이 협소했는데 주변에서 온 주민들까지 섞여있어서 혼잡했다. 계산대 앞에 있던 40대 여인을 보던 딸이 한국인처럼 보인다는 말을 속삭였다.  줄이 길어 내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 뒷얘기는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그 여인이 딸에게 말을 걸었다한다. 한국인이냐고. 워낙 바쁜 상황이라 몇 마디 못 나누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 여인은 반가움에 가슴이 울컥했을 수도 있겠다싶었다. 그  도시에 사는 한국인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하니 말이다.

버스를 갈아탔던 프린스조지에서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여유시간이 한 시간 반 정도 되었기 때문에 딸과 걸어서 시내로 들어갔다. 밤 아홉시가 조금 넘었는데 길에 별로 사람이 없어서 으스스한 느낌이었다. 24시간 영업하는 체인음식점과 주점들만 영업을 하고 있어서 밥을 먹기 위해서는 꽤 걸어야했다. 우리가 원하는 음식은 초밥이었다.

와사비라는 명칭의 초밥집이 눈에 들어오자 우리는 걸음을 더 빨리했다. 안에서 한 팀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한쪽에서는 청소를 하기 위해 테이블 위에 의자를 거꾸로 올려놓고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간 딸은 지금 식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들어오라던 주인남자를 보면서 나는 일본인 같다고 했고 딸은 중국사람 같다고 우겼다. 아무튼 우리는 한쪽 구석에 앉아 두 가지의 음식을 시켰다. 우동과 초밥이었는데 우동은 다시국물이 졸았는지 간이 짰고 초밥은 냉장보관을 해둔 탓에 뜸이 들지 않은 밥처럼 서걱거리면서 지나치게 차가웠다.

중간에 주인이 반찬을 더 가져다 주면서 무어라 말했고 딸이 설명을 곁들인 대답을 했다. 주인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렸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인은 연어 알이 담긴 누드 김초밥을 가져왔다. 어안이 벙벙해진 우리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서는 그 접시마저 비웠다. 초밥을 진열해놓는 유리진열장 안에 여분의 초밥이 있었기 때문에 주인의 행동이 이해는 갔다.

계산대에 가서 딸이 계산을 하는 동안 주인이 진열장의 안의 초밥을 다시금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설마, 라는 생각을 하다가 도리질을 했다.  더 바라면 언감생심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남자가 진열장을 열고 초밥을 꺼낼 때 일부러 나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그 남자는 봉투에 그 초밥을 담아주면서 또 내 어깨를 두드렸다.

국경을 초월한 선심에 탱큐를 연발했지만 속으로는 잠깐 딴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차피 초밥은 내일이 되면 버릴 수 밖에 없는 음식이라고.

오는 길에 나는 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동양의 나이 든 아주머니가 등산배낭을 짊어지고 그 가게에 들어갔던 게 내가 최초인 모양이다' 라고. '혹시 딴 생각이 었었던 것 아냐?' 라는 딸을 질문에 '내가 그 사장의 어머니와 얼굴이 닮았나보지' 라는 식으로 어긋난 응수를 했다. 다행이 얻어 온 초밥 중 하나는 익힌 새우초밥이었고 다른 한 가지도 익힌 음식을 이용한 롤초밥이었기 때문에 아침까지 두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터미널로 돌아오니 열시반이 가까워있었다. 이십여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터미널에는 잡다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그들 중에는 술에 취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우리가 탄 버스의 거의 맨 뒷자리에 앉았던 가족들도 보였다. 꼬마는 터미널의 바닥에 앉아 생글거리고 있었다. 우리네 같으면 옷 더러워진다고 뭐라 할텐데 그 가족들은 아이를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이들을 대하는 그들의 방식이 훨씬 더 합리적인 것 같았다.

 스물 한두 살쯤 된 남자직원 하나는 정장 스타일의 제복바지를 힙합바지처럼 입고 있어서 우스꽝스러웠다. 바지의 벨트가 간신히 엉덩이에 걸쳐있어서 가끔 그 남자는  바지를 추켜올려야만 했다.

버스가 한 대 더 왔던 이유는 승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몇 개의 도시를 거르고 간다는  버스를 탔다. 소도시가 목적지인 사람은 다른 문으로 나갔다. 터미널은 작았는데 출구는 세 군데나 되었다.

새벽길을 버스가 달리는 동안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지만 그나마 오래 자진 못했다. 프린스조지에서 함께 탄 한 백인 여자의 발에서 고린내가 너무 났기 때문이었다. 한 오년쯤 줄기차게 신었을 법한 부츠를 벗고, 다리를 통로 쪽으로 쭉 뻗은 채 자고 있는 그 여자는 좌석을 두 개 다 차지하고 있었다. 승객이 많았기 때문에 그 여자의 행태가 꼴사나웠다. 여자는 가끔씩 깨기도 했는데 정류장에서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는 척 하고 있는 그 여자 앞에 잠깐씩 서 있다가 다른 자리로 가곤 했다.

내 앞자리에는 터번을 두른 남자가 자고 있었다.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었는데 그가 마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길게 기른 머리칼을 딴 다음, 긴 천과 함께 머리에 돌돌 감기 때문에  터번이 엄청 무겁다 한다. 죽은 깨가 있던 얄미운 그 아가씨와 터번을 두른 무슬림복장의 그 중년남자 얼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일박 이일 간의 버스여행.  빅토리아섬을 거쳐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는 여정 중 가장 힘든 시간이었으며,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과 특별한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잘한 에피소드는 내 뇌리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아쉬운 것은 그 무렵 몸이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에 사진을 거의 찍지 못했다는 점이다.

록키를 다녀왔을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던 4박 5일간의 여정도, 밴쿠버에 도착하면서 끝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