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치앙마이에서 방콕까지는 비행기로 갈 예정인데 소요시간은 한 시간이 채 안 된다. 탑승시간은 오전 열시 반. 숙소에서 가까운 도로까지 걸어 나와서 뚝뚝을 잡았다. 출근 시간이면 혼잡할 수 있어 조금 일찍 나온 셈이었다. 공항까지 꽤 먼 거리였다. 뚝뚝이 달리는 동안 치앙마이의 풍경들이 재빠르게 지나갔다.

여객기는 10분 정도 연착을 했다. 탑승해서 보니 좌석 6개가 한 줄인 소형 여객기이다. 맨 안쪽의 창가 자리에 내가 앉았다. 조금 후 젊은 남자가 와서 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남자는 대기실에서도 딸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가방이 유난히 커다란 걸 보니 오랫동안 여행을 하는 사람인 듯. 딸과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독일남자라고 한다. 직장인이고 한 달 동안 여행을 한단다. 그 청년의 영어회화 솜씨도 괜찮은 것 같다. 이륙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내릴 준비를 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방콕 공항의 수색대에서 소란이 있었다. 옷과 소지품을 바구니에 넣었던 우리는 깜짝 놀랐다. 딸의 노트북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남자직원 서넛이 우리를 따로 불렀다. 그들은 우리가 노트북을 들고 오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하더니 화물칸의 캐리어에 넣은 게 아니냐고도 한다. 그러더니 우리의 배낭을 뒤지기도 했다. 딸과 나는 노트북을 들고 온 게 분명하다고 잘라 말했다.

노트북은 천으로 된 가방에 들어있었고 딸이 계속 들고 다녔었다. 신발 노트북 손가방 따위를 따로 따로 바구니에 담았고, 그게 하나씩 들어오는 걸 보고 있었는데 노트북만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우리의 뒤쪽에 서 있던 동남아인들을 의심하기도 했다. 한 오 분 정도 허탈한 심정으로 서 있는데 검색대 앞에 있던 여자 직원이 우리 쪽을 향해 소리친다. Is this not?

문제는 노트북용 보조가방이 분홍색이었다는 것. 스티로폼처럼 충격에 노출되지 말라고 씌운 그 가방이 문제였던 것이다. 분홍색 바구니에 담겨 있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바구니가 검색대의 직원의 눈에는 빈 바구니로 보였던 것이다. 노트북의 규격까지도 바구니의 밑바닥 규격과 딱 맞았다는 것. 물론 검색대 여직원의 불찰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가슴을 쓸어내린 사건이었다. 노트북에는 딸의 인생이 송두리째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수하물을 찾는 벨트 앞에 가니 이제 막 짐이 올라오고 있었다. 잠깐 잊고 있던 독일 청년도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카오산 로드를 들러 이틀정도 있다가 라오스로 간단다. 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방콕에서 라오스로, 그의 일정은 그런 식으로 계획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왕궁과 방콕 주변을 더 둘러볼 거라 말했다.

왕궁 외에는 전혀 계획이 잡혀있지 않은 하루였다. 돈이 떨어져가니 웬만한 기념품은 거의 생략하기로 했고 도보여행이나 할 예정이었다. 나는 딸의 경비까지 부담을 했기 때문에 딸 앞에서 엄살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하긴 딸의 영어실력 덕분에 그동안 잘 지냈으니 오히려 딸에게 고맙다고 해야 맞겠지만.

왕궁을 가기 위해 파야타이역에 내려서 우선 밥부터 먹었다. 푸드 코트인데 넓고 시원하다. 메뉴판을 보니 다른 곳과는 달리 가격이 좀 비싸다. 딸은 포크커틀릿을 시켰고 나는 새우볶음밥을 시켰다. 지금쯤이면 태국음식에 질릴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많다. 너무 시원해서 밥을 먹은 후에도 한참 앉아있었다.

길가에서 뚝뚝을 붙들고 왕궁을 가자니까 600밧을 달라한다. 종이에 뭔가를 그려가며 설명하는데 영어가 아니라서 알아들을 수는 없고, 바가지를 옴팡 씌울 것 같다는 생각만 든다. 150밧에 가겠단 뚝뚝이 있어서 그걸 탔다. 방콕 시내라서 길은 꽤 밀린다.

왕궁주변에서 내리니 인산인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짧은 하의를 입은 사람에게 필요한 치마. 파는데 150밧이다. 사원이 아니라서 괜찮을까싶었는데 또 가리라고 하다니...슬슬 짜증이 난다. 왕궁에 들어서니 3시 20분이 넘었다. 그곳에서 치마를 빌리는 사람들의 줄이 꽤 길고, 알고보니 관람시간은 4시까지라고 한다.

관람료는 한 사람당 500밧. 딸이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부족하니 관람하지 말자고 한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밀려드는 사람들 틈에 껴서 표를 받는 곳 근처까지 슬금슬금 걸어갔다.  그곳은 입구에서부터 꽤 먼 거리이다. 간혹 제복을 입은 직원들이 제지하긴 하지만 형식적이다. 어차피 표를 내고 입장하는 안쪽의 문 앞은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니 내버려 두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저기서 사진만 찍고 돌아나왔다. 나와서 왕궁을 에워싸고 있는 담을 따라 도는데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실감나기도 한다.

왕궁 주변을 돌다가 학생들을 만났다. 하교시간인 듯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더니 인도를 꽉 채운다. 인도에는 군것질 거리가 많다. 내 아이들이 어렸을 적 신신당부하던 게 불량식품은 사먹지 마라,였는데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춘다. 얼음을 섞은 콜라 두잔과 기름에 튀긴 만두를 샀다. 그 중 가장 의심스러운 게 얼음이다. 개울물을 떠다 얼렸을지도 모르지. 나는 콜라를 마시면서 중얼거린다.

돌아다니다 보니 강이 펼쳐져있다. 방콕의 젖줄이라는 차오프라야강이다. 마침 선착장이 있어서 배삯이 얼마냐고 물었는데 600밧이란다.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방콕의 역 근처에서 뚝뚝 기사가 뭔가를 그리면서 600밧이라는 말을 했었다. 기사는 뚝뚝과 유람선으로 한 시간 투어를 한다는 얘기를 하려했던 게 아니었을까?

나중에 알아보니 유람선이 아닌 여객선의 요금은 편도 13밧이란다. 미리 알아보고 왔다면 차오프라야강의 배 안에서 시내를 구경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여행이 좋기는 하지만 분명 무언가를 빼먹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차오프라야강의 주변만 다니는데도 볼거리가 많다. 사람을 만나고, 골목을 만나고, 광장을 만나고, 벤치도 만난다. 노천카페가 보이는데 아직 더운 시간이라 텅 비어 있다. 왜 자전거들을 벽에다 걸어놓은 거지? 갸우뚱 거리다가 내린 결론은 누군가의 작품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사진을 찍다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하다.

걷고 있는데 앞쪽에서 경찰관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카오산로드나 들러 갈까하고 경찰관에게 길을 물었다. 죽 길을 따라가면 된다고 했지만 사십분이 지나도록 카오산로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아가씨를 붙들고 물었더니 아직도 삼십분은 더 걸어야 한단다. 마침 가까이에 공원이 있어서 들어갔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티켓을 꺼내 탑승시간을 점검했다. 탑승시간은 열한시 반. 아직도 여유시간이 많았다. 갑자기 김치와 깍두기가 생각나서 나는 딸에게 말했다. 김해공항에 도착하면 곰탕이나 순대국밥을 먹자고. 우리는 가로수에 걸려있는 꼬마전구에 불이 켜질 때까지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