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많은 징검다리를 옮겼을까?

   캐나다를 여행하다 돌아오니 대도시건 소도시건 다 찜통이다. 두 달 사이 우리나라는 열대지방으로 바뀌어있었다. 출발하기 전인 오월 초에는 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들긴 했지만 밤은 나름 서늘했었다.

시차 때문에 낮에 자다 깼는데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캐나다의 5월과 6월은 시원했기 때문에 감당이 더 안 되는 것 같았다. 여행기를 만드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침대에 금방 누워버리곤 했다. 대한민국의 여름은 이미 선풍기로 견딜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튿날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내리다 말다를 반복했지만, 밤이면 천둥번개를 동반하면서 무섭게 내리곤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기 때문에 보강천 곳곳의 수문은 아예 열어두고 있었다.

지난주 토요일 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천둥번개가 잦았지만 흔한 일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잤었다. 비는 천천히 시작해서 거세어지고 다시 조용히 내리곤 했다. 시원했기 때문에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상쾌하게 들리던 밤이기도 했다. 6시쯤 잠깐 깨었는데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폭우에 가까웠다. 저러다 일 나겠는데? 라고 중얼 거리면서 고추와 가지 토마토를 떠올렸다. 이틀 전에 밭의 한쪽에서 무성하게 자랐던 풀을 뽑았는데, 그때 뿌린 열무 씨앗이 걱정되기도 했다. 때마침 아는 사람이 전화를 해왔다. 텔레비전에서 청주, 증평이 난리가 났다고 한다며 뉴스를 보라고 했다. 채널을 돌렸는데 거의 뉴스가 끝나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밭은 괜찮겠냐고 물었다. 나는 ‘고랑에 물이 많이 차겠지. 열무를 뿌렸는데 쓸려 버리려나?’ 마치 남의 밭 얘기하듯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사월 말께쯤 나는 그녀와 밭에 몇 가지 작물을 심었었다. 밭 크기가 사오십 평 규모였는데 동네 사람에게서 얻은 거였다. 얻을 당시 그 밭의 한쪽에는 비닐이 덮여 있었고 한쪽은 아예 풀밭이었다.

밭을 얻자마자 그녀에게 밭을 함께 경작하자고 제안했다. 우선 내가 풀을 뽑았고 밑거름도 했다. 어이없게도 그녀는 고추 모종을 100개 가까이 사왔다. 고추를 함께 심고나자 날이 가물어서 물도 몇 번이고 줄 수밖에 없었다. 옆에 논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짜증스러웠다.

내가 캐나다로 떠난 이후에 난 풀은 그녀의 몫이었는데 제초제를 뿌렸던 모양이었다. 이파리가 다 떨어져버린 고춧대가 3분의 1쯤 되는 것 같았다. 일부 옥수수와 고추는 풀 속에 방치되어 있기도 했다. 그녀가 공장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이해는 갔다. 내게 몇 번이나 풀을 깨끗이 뽑고 작물을 잘 키워 놓겠다고 했지만, 약속이 지켜지기 어려울 거라는 짐작은 했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농사 걱정은 아무것도 아닌 듯 했다. 강이 범람하면 도시 전체가 큰일이었다. 텔레비전을 켤까하다가 컴퓨터를 열었다. 검색해보니 청주와 증평에 관한 뉴스가 즐비했다. 청주는 침수된 주택이 많은 모양이었다. 증평은 보강천변의 주차장에 있던 차들이 물에 잠겼다는데 57대나 된다고 한다. 나는 직접 확인하기 위해 장화를 신고 휴대폰까지 챙겼다.

불 구경 다음으로 물 구경이라더니 정말 놀라웠다. 황토색의 물은 넓디넓은 강을 채우고 둑의 가장자리까지 차올라있었다. 물이 더 차오른다면 국도를 잇는 다리의 통행도 금지시켜야 할 것 같았다.

                                                         -승용차가 강물에 빠져있다-                               

청둥오리들이 갈대숲으로 몸을 피하느라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그것들에게는 홍수보다 무서운 게 사람인 것 같았다. 나를 보더니 도망치려는 자세를 취했고 하마터면 물에 쓸려갈 뻔했다. 위험에 직면해서도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궁화나무를 덮친 쓰레기더미(물 빠진 후)

산책로에서 마주치는 버드나무는 밀려 내려오는 쓰레기 더미 때문에 한쪽으로 쏠려 있거나 쓰러져 있었다. 쓰레기 중 나무토막도 많았는데 대부분 강변에 설치된 데코의 일부분이었다. 7-8년 된 데코가 썩어서 뜯어내는 중이었는데 그걸 미리 치우지 않아서 강물에 떠밀려가는 것 같았다.

강물을 따라 가다보니 어느덧 미루나무공원. 강가에 난 산책로를 따라 운동 삼아 다니곤 했는데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갈 정도였다. 공원과 강은 사이에 둑이 있었는데, 그 둑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몇 십 년 만의 홍수이니 내게는 경이로운 광경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후부터 서쪽하늘이 먹구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곧 비가 그쳤다. 비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면 내일 일찍 일어나 고추밭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밭으로 가는 길은 다리 밑이라서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물론 국도를 무단횡단을 하면 갈 수도 있었지만 이미 들과 강의 수위가 같아서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밖을 내다봤다. 밤에 비가 오지 않았으므로 안심하고 있었지만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이 소량의 비였다.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밥 먹고 세수하다보니 10시였다. 아직 흐리기는 했지만 더 이상 비가 올 것 같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밭은 강과 들을 가로지르는 둑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논의 한쪽을 잘라 만든 길쭉한 밭이었다.

언덕의 풀을 밟고 내려가면서 멍청하게 고추를 100포기 가까이 심었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그녀도 생각이 있어서 많이 심었겠지만 내겐 매우 언짢은 일이었다. 솔직히 고추를 어떻게 말리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녀는 아파트 살고 나는 빌라에서 사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무직이었고 주변에 고추를 널만한 공간이 많으니 결국 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홍수 덕분에 고민거리가 해결된 셈인가? 밭에 발을 딛는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다.

장화를 신었지만 뻘밭이라서 몸이 휘청 거렸다. 흉물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지와 토마토 줄기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고, 고춧대는 서있기는 하지만 더러 가지가 부러지고 잎에 뻘이 잔뜩 묻어 있었다.

비척비척 걸으면서 보니 도둑이 들었던 것 같았다. 포크 자국처럼 조그만 조류의 발자국이 밭두둑을 따라 죽 나있다. 며칠 전에 뿌린 열무 씨앗을 먹기 위해 나보다 먼저 밭을 방문했던 것 같았다. 자빠진 놈 밟고 간다더니...나는 썩소를 머금었다.

물이 흥건한 밭고랑에는 우렁이가 많았다. 논에서 떠 밀려왔다 물이 빠지는 바람에 고랑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비닐봉지에 주워 담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우렁이 된장으로 밥 비벼 먹을 생각을 하며 둑길을 오르다보니 저조했던 기분이 싹 풀렸다. 참으로 간사한게 사람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