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초콜릿 힐을 관광한 다음 나비 박물관, 행잉 브릿지, 로복강 순으로 투어를 했다. 로복강은 딱빌라란에서 초콜릿 힐로 가는 중간지점에 있다.

로복강 입구에서 우리는 투어를 위해 입장료를 내고 표를 끊었다. 선실이라고 할 수 있는 수상 레스토랑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는데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관광객들이 많아서 두어 가지 음식은 그릇의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사람들의 입맛은 거기서 거기인지 맛없다고 생각되는 음식은 식사가 끝난 다음에도 많이 남았다. 예쁘게 담겨있던 망고 조각을 집어 든 나는 한입 베어 물었다가 팽개쳐버렸다. 새콤달콤 짭조름한 맛이 아니라 시어 고부라진 그런 맛이었다.

음식은 그저 그랬지만 주변의 풍경은 심금을 울릴만했다.  내겐 현실적인 느낌이 아니라 그림 속 같은 풍경이었다. 녹색의 강이 활엽수와 야자수가 뒤섞여 있는 숲을 갈라놓고 있었고 선실에서는 기타리스트와 무명가수가 만들어내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배가 강 위를 미끄러지는 광경과 녹 빛으로 흐르는 강물, 그리고 실내의 음악이 어울어져 화음을 만들어내는 듯했다.

머리를 질끈 동여맨 채 흘러간 팝을 부르던 가수는 설거지를 하다가 온 것 같은 차림새였다. 그녀가 부르던 옛 팝은 많은 추억을 불러일으키게도 했고 주변의 풍경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들게도 했다. 부드럽고 아름답던 목소리와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이미지의 그녀는 전형적인 필리핀 여자였다.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보니 서양인도 눈에 띄었고 중국인도 보였다. 찬찬히 살펴봤지만 한국인은 우리뿐이었다. 우리 옆자리에 앉은 가족들의 구성원은 여섯 명의 여자와 초등학교 일이학년쯤 되어 보이는 혼혈 사내아이 하나, 삼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백인남자가 하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섯 명의 여자들은 자매인 듯했다. 사십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맏이인 것 같았고 아직 십대를 벗어나지 못한 소녀도 있었다. 여자들의 행색이 다소 초라했는데 상황으로 봐서 백인 형부가 처제들에게 로복강 관광을 시켜주는 것 같았다. 필리핀의 사정이 열악하다보니  백인남자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행복의 잣대는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로복강의 잔영이 지워지기도 전에 도착한 곳은 안경 원숭이의 보호구역인 타셔 연구소였다. 젊은 남자들이 관광객들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원숭이들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눈이 지나치게 커서 이티를 연상시키는 원숭이들의 크기는 어른 주먹만 했다. 새끼일 때의 크기를 엄지공주 정도로 가늠하다가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안경원숭이가 엄지왕자가 되어 동화속의 엄지공주와 결혼을 한다는 상상이었다. 어차피 엄지공주 크기의 인간은 없을 것이므로. 하지만 엄지공주는 매우 예쁘므로 이 커플들의 호칭은 미녀와 야수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안경원숭이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영장류이다. 4,500만 년 전부터 생존한 안경 원숭이들이 멸종위기에 처해있어 보호를 받고 있는데, 환경파괴나 남획이 문제라 한다.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애벌레였다. 가느다란 막대기 끝에 애벌레를 매달아 원숭이에게 주었는데 손바닥을 마주쳐 잡아서 먹는다. 동작이 어찌나 귀엽던지 딸이 감탄사를 쏟아낸다. 뒤이어 딸이 애벌레도 없는 막대기를 가져다대니 원숭이는 또 손바닥을 마주쳤다. 나는 원숭이를 놀린다면서 눈을 흘겼고 안내원도 그러면 안 된다는 손짓을 해보였다.

다음 코스인 바클라욘 성당은 딱빌라란에서 6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1600년경에 지었다는데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건물이다. 200여명의 원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지었다는 이 성당은 바다 속의 산호를 벽돌 대신 썼다. 벽돌 모양으로 자른 산호를 쌓고 겉에 바른 시멘트 반죽에는 계란을 섞었다. 계란 때문인지 아니면 산호라서 그런지 벽은 밝은 노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성당에 들어가기 전 짧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몸에 두를 천을 준다. 실내의 벽은 푸른곰팡이와 이끼가 끼어있었다. 석유를 묻힌 걸레로 바닥을 닦는지 미끌미끌하고 냄새가 코를 찌른다. 모든 소품들이 낡아서 우중충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교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었는데 다소 음침한 느낌이었다.

밖에서 바라보니 폐허 같은 느낌도 들지만 보통 성당과 마찬가지로 주말 또는 그 외의 날에도 미사를 본다. 성당의 지하에는 감옥이 있다는데 들어가 보진 못했다. 로마 가톨릭의 규칙을 위반한 자들을 처벌하던 성당이었다 하니 중세 기독교의 암흑기를 연상시키는 곳이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 코스는 혈맹기념비였는데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이 전부였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시기인 1500년 경 스페인 총독인 미구엘 로페즈와 보홀의 추장 시카투나가 평화우정협정을 맺게 된 걸 기념하는 비라고 한다. 우리는 잔을 맞대고 있는 조각상들을 끌어안고 사진촬영을 했다.

투어를 끝내고 보홀 비치클럽으로 갔다. 비치클럽 리조트는 가격 대비 숙박료가 비싸기 때문에 숙박을 하지 않고 해변에서 놀기만 하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대신 입장료를 내야한다. 워낙 광대한 해변이었고 사람들이 흩어져 있어서 한산한 느낌이었다.

 모래땅에 야자수가 심어져있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눈에 띈다. 해변에는 바다에서 밀려온 조개껍질과 산호 부스러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산호가 만들어낸 해변의 모래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앞에 펼쳐진 바다는 암록 빛을 띠고 있었다. 우리가 낸 입장료 750페소는 음식 값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샌드위치와 망고주스를 주문할 수 있었다. 접시에 놓고 랩을 씌어 온 샌드위치는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먹으니 기분은 그만이었다. 나는 야자수에 매어져있는 그물침대에 누웠고 딸과 아들은 바다에 들어가 놀았다.

5시쯤부터 해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해변이 동서로 뻗어있는데다 활처럼 휘어져 있어서 동쪽부터 진한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해를 따라서 빠른 속도로 걸었고 겨우 낙조를 볼 수 있었다. 태양의 광채가 지나쳐서 사라질 때까지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바다에 닿기도 전에 태양은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고 하늘에는 붉은 기운만 남았다. 수평선을 향해 움직이는 돛단배와 뒤쪽의 배경으로 남아있던 노을이 사라지자 해변이 깜깜해졌다. 우리는 세면장으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