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에 가다
-엘에이 한인타운. 한국의 후미진 도시 풍경과 비슷하다 -
8월 중순이 지나고 하순에 접어드니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다. 짐을 싸면서 미국은 날씨가 다르겠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며칠간 딸은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를 어떻게 키우나 걱정을 하고, 나는 미국으로 들어갈 때의 인터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 중이다. 통화를 하면서 인터뷰 걱정을 하면 남동생은 별거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드디어 공항 가는 길. 딸의 표정이 어둡다. 손주는 승용차가 움직이자 금방 잠이 든다. 나는 아기를 어루만지면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니가 옆자리에 앉아, 라고 딸에게 말한다. 공항으로 가는 도로변에서 가을꽃들이 한들거리고 더 멀리 자리한 숲에는 붉은 빛깔의 잎들이 가끔씩 눈에 띈다. 도착해서 보니 몬트리올 공항의 규모가 상당히 작다. 입국할 때 걱정 반 두려움 반이었기 때문에 몬트리올 공항이 거대해 보였나보다.
햄버거나 먹을까하고 음식점에 들렀는데 웬걸 스시도 있다. 캐나다달러를 다 쓰고 가야하기에 진열장에 놓여있는 스시를 달라고 했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스시가 차갑다. 세 사람 다 맛있게 먹는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앉아 있다 보니 출발할 시간. 딸이 미소를 보인다. 자식이 생겨서 엄마와의 이별이 그리 힘들지 않나보다. 동생 집으로 가기 때문인지 나도 기분이 좋다.
검색대에서 여권을 내밀자 직원이 나를 쳐다본다. 직원은 미국에 들어가는 목적이 뭐냐고 묻는다. 마이 브라더스 도터스 웨딩이라고 앞뒤가 잘 안 맞는 대답을 했다. 그 외에도 몇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대충 얼버무리고 게이트로 들어갔다.
항공기 좌석은 통로 양쪽에 각각 세 자리였다. 가운데 자리에 앉았던 흑인 아가씨가 뒤로 가는 바람에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인여성과 빈자리를 가운데에 두고 앉았다. 큼지막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낀 그녀는 미색 정장을 입고 있어 고급스러운 이미지였다. 그 여자의 남편은 건너편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웃음기 없는 그녀를 보면서 쌀쌀맞은 백인일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다. 생각해보니 가진 자에게서 느껴지는 우월감(?) 같은 걸 그녀에게서 감지했던 것 같다. 아니라면 내가 그녀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열등감을 가졌을까? 떠올려 봐도 그때의 기분은 찜찜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 같다.
소규모 비행기라 낮게 날았다. 나는 계속 창밖을 내다봤다. 나무는 없고 바위투성이인 산이 끝없이 펼쳐져있어 황량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이어지는 바위산 어디쯤엔가 그랜드캐니언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꼼꼼히 살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이미지라 콕 집어내기는 어려웠다.
물기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산줄기 아래쪽에 독특한 모양의 들이 펼쳐지기도 했다. 나중에 둥그스름한 모양의 밭에 대해 동생에게 물어봤는데 물을 주기 편리하라고 둥글게 작물을 심는다한다. 잔디밭에서 칙칙 거리며 돌아가는 분사기를 떠올려보면 될 것 같다.
엘에이 공항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객기가 도심에 들어서자 공기가 탁하다. 엘에이가 엄청 큰 도시인가보다. 착륙하겠다는 방송이 나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니까. 나는 이미 한국인 승객들을 눈여겨보아 두었기 때문에 별로 긴장이 되지 않는다. 드디어 비행기가 착륙을 시도 한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건너편 앞자리에 앉았던 한국말을 쓰던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중년 여성들은 퀘벡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한다. 내가 가을에 가야 제 맛인데, 라는 말을 했더니 한 여성이 웃으면서 여름휴가라는 말을 했다. 인터뷰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중년여성들을 따라서 가다보니 짐을 찾는 곳이다. 말하자면 인터뷰를 할 필요가 없게 되어버린 거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구간은 검색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나온단다. 그때서야 몬트리올 공항에서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 직원에게 받았던 몇 가지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인터뷰는 5시간 전에 끝났던 것이다.
출입구 부근에서 카카오톡으로 동생에게 도착했음을 알렸다. 동생과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조카가 대신 온단다. 동생은 기다리는 시간이 사십분 이상 될 거라는 말을 덧붙인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11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밖이 오히려 더 혼잡한 것 같다. 무리지어 다니는 동양인들이 많았는데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중국인이나 한국인들이다. 계속 서 있으면서 살펴보니 백인이나 흑인보다 동양인이 더 많은 것 같다. 엘에이에서는 영어가 서툴러도 살기 어렵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픽업을 위해 승합차나 승용차가 도로변에 서곤 했다. 그 차들은 시동을 켠 채 누군가를 기다리다 떠나고, 잠시 후 다시 와서 그 자리에 섰다. 물론 오자마다 사람들을 픽업해서 떠나는 승용차도 있었다.
내 앞쪽으로 횡단보도가 있었기 때문에 건너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지루해서 멍하니 있는데 횡단보도에 선 한 여자가 내 시선을 잡는다. 여자는 빨간 빛깔의 커다란 꽃무늬가 박힌 치마를 입고 있었다. 집시들이 입는 치마처럼 치렁치렁했고 갈라진 틈으로 레깅스를 입은 다리가 보였다. 옷차림이 튀었기 때문에 여자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혹시나 해서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거기에 한 남자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상의는 양복이었고 아래쪽에는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남자였다.
파란불로 바뀌자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고 건너편에 서 있던 남자가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여자가 남자 앞에 서자 남자는 꽃을 건네주었다. 잠깐 어색해 보이는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곧 자연스러운 풍경으로 바뀌었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거의 한 시간이 흘렀을 때 기다리던 승합차가 왔다. 조카는 조수석에 앉아있었고 운전자는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 남자는 동생의 고교동창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카는 나를 보면서 해맑게 웃었다.
우리가 가는 곳은 한인촌 근처에 있다는 호텔이었는데 공항에서 꽤 멀었다. 도로는 혼잡했고 매연 때문에 서울을 떠올리게 했다. 다만 가다가 자주 만나는 야자수와 영어로 표기된 간판이 엘에이임을 일깨워주곤 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코리아타운이었다. 우리 차는 옥스퍼드 팰리스라는 호텔 앞에 섰다.
호텔은 핑크빛이 감도는 4층 건물이었는데 연식이 꽤 되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로비는 넓었고 나름 잘 꾸며져 있었다. 객실로 들어가자 낡은 창틀과 짙은 갈색의 구식 가구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바깥 풍경 또한 후미진 뒷골목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했다. 하긴 공항에서 호텔까지 오면서 느낀 거지만 엘에이는 매연과 낡은 건물이 많은 도시였다.
시간이 좀 남아서 밖에 나가 돌아보기로 했다. 총기 소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둘째 올케는 객실에 남았고 나와 언니, 형부는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에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한국인이 많았다. 길가에는 덩치가 큰 가로수가 즐비했는데 대부분 생소한 나무들이었다.
운동 삼아 한 시간 이상을 걷다가 더워서 카페에 들어갔다. 가게는 좁고 긴 모양이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꽃이 진열되어 있었고 골동품 가게처럼 이런저런 소품들도 있었다. 내 보기에는 차만 파는 가게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말고는 손님이 한 팀 밖에 없었다. 한자리 건너의 테이블에 너덧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목회자였다. 강남에서 온 사람이 있는지 이야기가 서울과 그 지역을 맴돌았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계산대에 목이 굵고 피부가 구릿빛인 남미 계열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아침에 머리를 만져야했기 때문에 나는 스프레이를 집어들었다. 여섯 개 들이 맥주와 스낵도 샀다. 계산 할 때 하우머치라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편의점의 사장이라는 그가 한국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은 근처의 식당에서 먹었는데 그곳에서는 내장탕과 우거지해장국 따위를 팔고 있었다. 손님이 전부 다 동양인이라서 한국의 어느 가게에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내장이 충분히 들어가 있었지만 국물의 간이 짰다.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건지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싱거운 육수가 왔다. 음식 값은 12달러에서 15달러 정도였다. 아무래도 봉사료가 있어 음식 가격이 한국보다는 좀 높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빠졌다. 안주로 파닭이 나왔는데 익숙한 맛이었다. 한국의 주점과 비슷한 느낌이었고 손님은 동양인 백인, 흑인이 엇비슷하게 섞여있었다. 1700씨씨 피처에 흑맥주가 담겨 나왔다. 동생은 가장 맛있는 맥주라면서 잘 마셨지만 내 입엔 그냥 그랬다. 나는 흑맥주 특유의 쌉싸름한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음날 연회 때문에 주점에 두어 시간 앉아 있다가 나왔다.
산문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