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서 내린 우리는 도로를 따라서 줄곧 걸었다. 걷는 중간에 도로가 언덕을 이루고 있어 숨이 차오르기도 했다. 도시가 선착장에 비해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로에서 바다를 향해 시선을 내리니 여러 척의 배가 눈에 띄었고 선착장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를 따라 포물선을 그리듯 철로가 누워있는 게 보였다. 철로 때문에 정동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가끔씩 집들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마을의 형태로 봐서는 중심부와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십 여분 더 걷자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프린스루퍼트의 변두리쯤 되는 것 같았는데 더러 소박한 음식점이 보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제대로 온 거 맞아? 라고 딸에게 물었을 때 딸도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점점 건물들이 많아졌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의 숫자도 늘어났다.

한국의 동해와 비슷한 지형인 듯 높은 곳에 위치한 집도 많았다. 언덕에 위치한 집일수록 호사스럽게 지어진 게 특징이었다. 대부분의 도로가 낮았다가 높아지곤 했기 때문에 롤러스케이트를 타면 꽤 스릴이 있을 것 같았다. 약속이나 한 듯 빨간 페인트로 도색한 건물들이 많아서 도시 전체가 산뜻한 느낌이었다. 예약했던 모텔을 찾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베드 앤 브렠퍼스트라는 이름처럼, 여주인은 음식과 커피를 파는 자그마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중국풍의 옷을 입은 여인네들 둘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인인 주인이 안에서 나왔는데 예쁜 미소를 가진 여자였다. 상냥한 말투에 가녀린 몸매의 그녀는 우리를 무척 친절하게 대했다.

계단에서 특유의 안 좋은 냄새가 나긴 했지만 집안은 정갈했고 방은 훈훈했다. 욕실이 따로 있었는데 그 외에는 별 불편함이 없는 모텔이었다. 짐을 내려 두고 밖으로 나오자 가랑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프린스루퍼트도 비가 잦은 곳인 듯 했다. 부슬부슬 내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대비로 바뀌었는데 그 또한 얼마가지 않았다. 십 여분 쏟아지다가 그쳐서 다행이긴 했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찾던 레스토랑은 구석진 곳의 건물 이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점심시간이 지나면 문을 잠시 닫는다 해서 좀 실망스럽긴 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스시집이었는데 주방에 있던 남자가 배우 정진영과 흡사한 얼굴이었다. 행동으로 봐서 그 남자가 사장일 것 같았다. 주문 후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한국남자였다면 틀림없이 농담을 던졌을 것이다. ‘배우 일은 접으신 거예요?’ 라고 말이다.

미스코리아만큼이나 좋은 몸매에 속눈썹이 유난히 길어 무척이나 예쁜 눈을 가진  종업원 아가씨는 우크라이나 출신이란다. 딸과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캐나다에 온지 두 달이 채 안됐다고 한다. 시골스러운 분위기의 항구도시에 관광객 말고는 외지인이 별로 없어서 아가씨의 삶이 삭막할 것 같았다.

나는 주문을 받는 아가씨를 바라보면서, 아가씨가 틀림없이 스시가게의 매출에 꽤 도움을 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가게 건너편에 수산물집하장이 있기는 하지만 스시집이 들어앉은 건물은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좁은 내부에 비해 손님이 꽤 많았는데 어찌 보면 민속주점 같은 분위기였다.

싸고 푸짐한 음식을 찾느라고 메뉴판을 오래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 음식은 더 느리게 나왔다. 사케를 시켰는데 등잔만한 병이 나왔다. 술잔은 소꿉놀이를 하면 딱 알맞을 정도로 작다. 술잔을 앞에 두고 숨만 들이키는데도 술이 줄어드는 것 같다. 잠깐사이 두병이나 비웠지만 술이 아니라 차를 마신 것처럼 취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손님들이 거의 빠져 나가자 우리도 밖으로 나왔다.

프린스루퍼트 시내의 한켠에는 일본식 건물에 일본인들이 탔던 자그마한 배가 유물처럼 전시되어 있다. 조류에 떠밀려 왔다고 한다. 박물관도 있었지만 들어가진 않고 기념품 가게에서 아이쇼핑만 하다나왔다.

프린스루퍼트는 원주민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인근의 국립공원에는 입구에 인디언 얼굴이 새겨져 있는 목각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나무가 우람한 숲길을 한참동안 걷다 나왔다.

그 숲 가까이에 있는 집들은 환경이 열악해 보였는데 원주민들이 눈에 자주 뜨였다. 우리와 함께 크루즈선을 탔던 원주민부부의 집이 그 근처에 있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느 집은 낡은 보트가 옆의 공터를 차지하고 있었고, 또 어느 집의 정원에는 장갑차처럼 바퀴가 커다란 옛날식 자동차가 세워져있기도 했다.

빈집이 하나 있어서 들여다보기 위해 갔다가 우리는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가 유리창에 그림을 붙여놓았는데 반투명비닐에 그려진 유령얼굴이었다. 딸이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하는 것 같다면서 웃었다.

다시 베드 앤 브렠퍼스트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손에는 술과 몇 가지 먹을 게 들려있었다. 점심을 거나하게 먹었으니 저녁은 간소하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여자가 운영하는 카페에는 들르지 못했다. 계단을 올라와서 주인 없는 거실과 방들을 살폈다. 영화를 좋아하는지 거실에 비디오테이프가 잔뜩 쌓여 있었다. 서랍장에는 접시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고 몇 가지 음료수가 냉장고 보관되어 있었다.

 결혼한 사람이라는데 10시 가까이 되도록 다른 가족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는 주인여자가 몇 시에 들어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날 밤 우리는 단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