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되어서는 갈등때문에 절망에 빠질 때도 있었다. 가끔 나는 현실을 도피하는 장소를 떠올리기도 했다. 아파트 6층, 호젓한 산길에서 만난 가지가 튼튼한 나무,  바다와 마주 닿아있는 절벽. 하지만 나는 그런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만 했을 뿐이다. 상처를 입을 가족 생각에 실천은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때때로 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갑자기 바라본 그의 코가 삐뚜름해 보인다거나 입술이 자극적인 색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그걸 소설에서는 연상 작용이라고 한다). 결국 내 생각의 끝은 어떤 속설에 닿는다. 코와 입술은 생식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속설 말이다.

나는 사물을 빤히 바라보는 버릇이 있는데, 이유는 바라봄과 생각함의 기능이 동시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생김을 관찰하고 그 생김이 가져다주는 느낌까지 동시에 얻으려 하는 버릇이랄까? 나는 그 버릇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한다. 가령 어떤 남자를 그렇게 바라봤다고 하자. 그 남자의 눈빛이 내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나를 좋아하나?" 아니라면, "혹시... 당신, 나를 알아요? "

이 나이에도 나는 종종 사랑을 꿈꾸는데 항상 실패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상상의 나래가 나를 가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한 만남인데도 나는 그와 사랑을 하고 이별의 시간까지 가 있다. 글쟁이가 만들어 낸 상상이니 어찌 단순하랴. 결국 나는 사랑을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비참하거나 슬픈 상황과 마주치는 것이다. 물론 그건 내 마음의 갈등과도 관계가 있지만 내가 갖고 있는 상처나 연민과도 무관하진 않다.

사랑을 하는 시간에 나는 자문을 한다. "나, 지금 네 생각에 눈물 나고 쓸쓸한데 너도 그렇지?" 물론 상대는 아닐 것이다. 내게 있어 사랑은, 공상이나 망상을 만들어 내는 이상한 물건이라고나 해야할까.  

 내 갈등은 여행지에서도 어김없이 작동을 한다.  

아침시간인데 건물의 그늘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는 중년 여인. 배에서 내린 생선을 잡상인들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하던 노무자가 여인네를 힐끗거린다. 여자는 밤기차로 왔기 때문에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으며 노무자는 마흔이 넘은 나이인데 총각이라서 여자를 힐끗거릴 수밖에 없었다.

점점 해는 솟아오르고 노무자의 온몸에서는 땀이 퐁퐁 소리를 내며 솟구친다. 여자는 리어카의 달궈진 손잡이에 노무자의 손이 델까봐 걱정이 된다. 그래서 더욱 더 남자를 쳐다볼 수밖에. 여자의 시선을 느끼던 남자가 느닷없이 묻는다.

"부르지도 않고 혼자 먹어요?"

껄껄 거리는 남자에게 여자는 술잔을 건넨다. 결국 소주 두잔 얻어먹은 남자는 점심을 산다. 여자는 나중에 점심을 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수 년동안 그 부두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갔던 그 부두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리어카로 횟감을 실어나르는 그런 사람이 필요없는 회센터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지 못했다. 아니 소설 속의 에피소드로도 쓰지 못했다. 이처럼 내가 겪은 이야기가 실제 극적인 구조를 갖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갈등에 갈등을 거듭해도 스토리가 잘 만들어지진 않는다.  

갈등은 늘 나를 버겁게 하지만 결국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즈음 나는 소설을 쓰지 못해 갈등을 하고 있는 중이니 서글프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