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워크퍼밋 비자로 캐나다 밴쿠버에 머물고 있다. 딸은 스스로 벌어 생활을 하지만 큰 불만은 없는 것 같다. 어차피 나도 딸을 도와줄만한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나 열심히 받아준다고나 할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딸은 감당이 안 되는 상황에 빠지면 전화기를 통해서 나에게 위안을 받곤 했다. 어찌 보면 딸과 나는 모녀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작스레 내가 밴쿠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던 이유는 딸과 한 살 터울인 조카 덕분이었다. 추석연휴를 포함해서 ９일간 짬을 낼 수 있었던 조카가 밴쿠버여행을 한다했을 때 반기던 사람은 나였다．7-8개월 전부터 나는 캐나다 여행을 꿈꾸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비용 문제도 있었지만 실은 혼자서 출국수속을 밟는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연휴를 이용해서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공항은 상당히 혼잡스러웠다．배웅 나온 아들과 점심을 먹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서 차를 마셨다. 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출국수속이 늦어졌고 거의 꼴찌로 좌석배정을 받았다. 수속 전 줄을 서야 한다는 것을 깜빡한  탓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조카와 나는 떨어져 앉았다.　

중앙의 좌석은 세 사람씩 앉게 되어있었다．내 좌석은 공교롭게도 남녀커플 옆이었다. 나는 다섯 시간동안 오십 대 후반 쯤 되는 커플이 나누는 대화를 계속 들어야만 했다.  대화의 내용으로 봐서 그들은 삶을 함께 시작하는 커플 같았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지나쳐서 내겐 고역이었다. 나는 억지로 눈을 감은 채 그들이 서로에게 갖는 판타지가 얼마나 갈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나는 단 몇 분도 숙면을 취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착륙 서너 시간 전쯤부터 졸기 시작하더니 금방 곯아떨어졌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이 여권을 보자 한다. 여행사를 통해서 온 게 아니라서 그러는 모양이다. 아니라면 나를 보면서 보따리장수를 떠올렸을 지 모르겠다. 심사대를 통과할 때에는 직원이 질문을 해서 당황을 해야했다. 거처가 어디냐고 질문한 후 딸이 다니는 학교가 어느 대학이냐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가슴은 벌렁거렸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랭귀지스쿨이라는 대답을 했다. 그 여직원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큐라고 한다．나도 땡큐라고 응수했다.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땡큐와 쏘리  그리고 익스큐즈미 라는 것.  호주여행 때  딸에게 교육받은 내용이다.

공항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는데 전혀 복잡하지 않다. 밴쿠버는 교통체계가 잘 되어 있고 공원이 산재해 있어서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숙소인 메인 스트리트 근처에도 아름드리 가로수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짐을 풀고 슈퍼에 가기 위해 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마켓에 가는 동안 딸은 캐나다에서 주의할 점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한국과 다른 신호등 체계, 지켜야 할 에티켓, 거기에 길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 날이 추석이어서 우리는 몇 가지 전을 부치기 위해 재료를 샀고 송편도 샀다.

송편은 추석 전날 먹었고 당일에는 만둣국을 끓여 먹었다. 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서니 하늘이 파랗다. 딸은 우리더러 운이 좋다면서 웃는다. 벤쿠버의 가을은 우기의 시작이라는  딸의 설명이었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긴 했지만 집에서부터 4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캐나다플레이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다에 둘러싸인 밴쿠버를 실감할 수 있는 여행 첫날이기도 했다. 캐나다 플레이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물인데 밴쿠버 항구의 상징물이라 한다. 그날은 알래스카로 가는 크루즈선도 정박해 있었다.

가끔씩 갈매기처럼 경비행기가 하늘을 날기도 했다. 물 위에 떠 있는 새들은 갈매기 외에도 많았다. 까마귀도 바닷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였다. 까마귀와 갈매기는 꽤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서 때론 밉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벤쿠버 여행 중에 느낀 점이지만 시드니와 밴쿠버는 참 많이 닮아있었다.

딸은 자주 다니던 곳이라 식상한 듯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다. 내 눈엔 무엇이든 특별하지만 말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밴쿠버는 관광객이 들끓을 만큼 매력적인 곳임에는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