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읍에 들리자고 했던 건 작은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작은 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을 제주도에서 보내셨다.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이라서 제주도에 머무르셨던 이유를 자세히 알진 못한다.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집에 오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가져 왔던 게 귤이라는 과일이었다. 처음 보는 황금색의 그 과일을 어떻게 먹는지 몰라서 보고만 있는데 작은아버지께서 손톱으로 까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재담이 있으셨던 분이라서 제주도의 생활을 맛깔스럽게 들려주시곤 했는데 가장 압권이 똥돼지 얘기였다. 화장실이 밖에서 들여다보이는 구조였는데 사람이 변을 보기 위해 들어가면 돼지가 달려온단다. 사람이 설사라도 해서 변을 몸에 맞으면, 털어내기 위해 몸을 부르르 떤다는 말에 눈물 나도록 웃었던 기억이 있다. 모든 동물은 몸이 젖으면 본능적으로 털어내니 지어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애월읍의 해변에는 올레길이 예쁘게 만들어져 있고 군데군데 돌담이 있어서 운치가 더했다. 올레길의 빛깔이 산뜻한 걸로 봐서는 준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경관이 수려해서 놓쳤다면 매우 아쉬웠을법한 해안이었다. 관광객이라고는 우리와 60대의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데리고 다니는 개 세 마리뿐이었다. 간간이 빗방울이 날리는 날씨라서 관광객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올레길 근처에는 흔적만 남아 있는 집터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여러 가구가 이주를 한 것 같았다. 돌담만 남은 집도 있었고 어느 집은 헛간채가 남아있기도 했다. 돼지를 기른 흔적이 있을까싶어 살폈지만 발견할 수는 없었다. 돌아나오면서 둘러보는데 돌을 쌓아서 지은 초가 한 채가 눈에 뜨인다. 자세히 보니 비어있는 집이다.

애월에서 빠져나오니 한담해안도로라는 푯말이 눈에 띄었다. 샛길로 들어가니 곧 해안도로가 나타난다. 한담의 해안도로변에서는 악어바위, 코뿔소바위, 고양이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바위가 동물들과 닮아 보이지 않았다. 코뿔소 앞에 있던 아줌마들이 우리가 다가가는 걸 보더니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아들이 사진을 찍는 동안 슬쩍 쳐다보니 마네킹처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해 보이는 이미지의 아줌마들이다.

바람이 꽤 불어댔지만 춥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하긴 오리털 점퍼에 털실로 짠 모자 게다 장갑까지 끼었으니 춥다고 하면 이상할 수도 있겠다. 낮 기온은 5-7도를 오르내리고 밤에도 영상의 온도를 유지할 때가 많으니 12월 여행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계속 이어지는 해안도로. 다음 코스는 이름도 이상한 곽지괴물해변이었는데 그냥 지나쳤다. 한림공원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될 것 같아서였다. 한림공원 근처의 협재해수욕장도 들러야할 장소였다. 협재해수욕장은 이십오 년 전쯤 아이들과 함께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협재 해수욕장에 들어서자 옛 기억이 되살아난다. 바람에 가는 입자의 모래가 입안으로 날아들어 서걱거리던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때와는 환경이 바뀌어있다.

여전히 모래는 눈부셨지만 뜨개질하듯 엮어진 흰 비닐천이 모래를 덮고 있다. 더 이상 모래가 유실되지 않게 비닐천을 덮어놓은 것 같다. 주변의 야자수는 거목으로 성장해 있고 건물이 들어서있다. 화장실, 파출소 세면장 등등. 그곳에는 관광객들이 제법 많다. 협재해수욕장의 물빛은 에메랄드빛이다. 바다가 흰 모래를 품고 있어서인가?

한림공원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으면 식물원과 재암 민속마을, 쌍용동굴, 협재동굴을 전부 관람할 수 있다. 또 몇몇 조류와 열대 파충류까지도 볼 수도 있다. 성인관람료 일만 원. 입장료가 거금이다.

한림공원에는 열대식물을 많이 볼 수 있다. 공원이 무척 잘 꾸며져 있어서 돌아보면서 찬사를 연발하곤 했다. 갖가지 선인장이 있던 전시관에서 눈살 찌푸리는 광경을 보았다. 손바닥선인장 곁에는 낙서하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세워져있다. 손바닥 선인장을 보고 있으니 지저분한 낙서만 눈에 들어온다. 중국인 관광객들도 꽤 많았지만 쓰인 글씨는 죄다 한글이다. 정나미 떨어지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식물원에서는 봄과 가을에 피는 꽃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열대 식물전시관에서는 양서류와 파충류도 볼 수 있었는데 거처하는 곳이 너무 비좁고 열악하다. 환경 때문에 동물들이 향수에 시달릴 것만 같다.

한림공원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라한다. 창업주 송봉규회장의 조각상이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전시되어 있으며 석판에는 공원을 일궈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모래땅을 사들여서 수십 년간 가꾼 결과라 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곳의 야자수들은 70년대 초엔 묘목이었지만 지금은 아름드리 나무이다.  아열대지방의 야자수와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쌍용굴과 협재굴은 다시 보니 새롭다. 다만 천장에 균열이 많았고 떨어진 바위가 여기저기 놓여있어서, 언젠가는 굴의 문을 닫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쌍용굴이나 협재굴은 규모가 작고 종유석이 거의 없다. 제주도의 특성상 그 굴들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아직 완전하게 개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라산이 화산폭발로 인해 만들어진 산이니 굴 전체의 규모가 어마어마할 수도 있겠다싶다.

쌍용굴과 협재굴 사이의 잔디밭에는 석상들을 세워놨는데 바라보고 있으니 웃음이 피식 나온다. 인간들을 백인백색이라 하듯이 그 군상들의 모양새도 제각각이다.

두 굴을 관람하고 오솔길을 걸어 내려오니 조그만 기념품 가게가 보인다. 배가 고파서 오메기떡을 샀다. 가게 옆의 나무의자에 앉아 팥고물이 잔뜩 들러붙은 오메기떡을 먹었다. 말랑말랑한 오메기떡이라는 기념품 가게 앞의 광고문구가 무색할 정도로 떡이 딱딱하다. 물론 떡집이 아니니 가게를 탓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림공원에서 빠져 나오는데 멀리 서핑을 하는 게 보인다. 흔히 보는 윈드서핑과는 다르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도에서나 가능한 레포츠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서핑 하는 사람들이 생고생을 하는 것 같다. 마치 줄에 질질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점심을 거른 터라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고 중문 쪽으로 차를 돌렸다. 시장의 규모가 작아서 별로 볼 것이 없었고 시장 입구에 조그만 음식점이 있었다. 성게 미역국을 시켰는데 아주머니가 고봉 밥그릇을 가져다준다. 미역국의 그릇도 컸고 양이 넉넉했지만 대신 반찬은 초라했다. 성게미역국정식은 일인분에 일 만원이었는데 제주도의 어느 식당이나 비슷비슷한 가격인 것 같았다.

도심을 벗어나자 길이 깜깜하다. 가로등 없는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호텔의 팻말이 보인다. 항공우주박물관 근처에 있는 호텔인데 가격대비 너무 근사하다. 당일 세일가격이 75,000원이었는데 평상시 숙박비는 15만원이 넘는다한다. 들어서는데 로비 근처에서 크리스마스트리가 빛을 발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리자 카펫이 깔려있는 복도와 마주친다.

카운터에서 얘기한대로 보일러 계기판의 온도를 50도에 맞췄지만 방이 금방 따뜻해지진 않았다. 중문 시장 근처의 하나로 마트에서 사온 포도주와 몇 가지 안주를 펼쳐놓았다. 닭튀김과 마른안주, 과일 두어 가지이지만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방이 워낙 깔끔하고 넓으니 기분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들이 소란스럽게 했던 점만 빼면 불만이 전혀 없는 숙소였다. 그 가족들은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중국인들을 흉내 낼 때 꽐라꽐라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부부의 고성에 잠이 다 달아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