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단골(?)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고 해변으로 나왔다. 해변에는 의자들이 놓여 있고 누워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벌써부터 몇 군데의 레스토랑에서는 물 좋은 생선 몇 가지와 게와 새우를 가판대에 올려놓아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보라카이의 해변은 보홀에 비해 넓었고 관광객들도 훨씬 많았다. 뷔페식으로 음식을 차리는 레스토랑도 있었고 베트남이나 중국, 일본 음식점도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게와 생선은 반짝반짝 윤이 났지만 낮 동안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저녁에는 생기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야자수가 해변 가장자리에 죽 서 있어서 적당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음식점에서 놓아둔 테이블과 의자가 비어 있어서 거치적거리는 물건으로 보였다. 해변의 흰 모래에서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걷는데 한 남자가 길을 가로 막았다. 그 남자는 필리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말을 썼다.

듣고 있으니 세 사람의 요금이 3000페소나 된다는 말이었다. 물론 딸과의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소상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가로 젓자 돈의 액수가 점점 내려갔다. 맨 나중에 모래에 쓴 글자는 1500페소였다. 딸이 얘기를 끝내고 내게 설명을 하는데 점심까지 제공하는 투어가 3000페소이고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투어는 1500페소란다. 보라카이의 바다를 돌아보고 스노클링까지 포함해서 세 시간 동안 배를 쓴다는 조건이었다. 1500페소로 결정이 나자 두 남자가 더 왔다.

그들이 내미는 장부에 가족의 이름을 적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조난 사고를 대비해서 적는 중이었지만 바다가 잔잔했기 때문에 적는 동안 아무 느낌이 없었다. 스노클링 장비가 배에 있었는데 돈을 지불해야만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딸은 집에서 가져간 장비를 썼고 아들은 배에 있는 장비를 썼다.

우리가 빌린 배는 보라카이 앞 바다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배였다. 배 옆 부분에 안전판이 설치되어 있어서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모양새였다. 여섯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비좁은 느낌이었다. 배에 오르자마자 구명조끼부터 입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가 탄 배와 같은 구조의 배가 가장 많았고 돛단배도 눈에 띄었다. 쾌속정은 몇 척 되지 않았는데 모양이 제 각각이었다. 어떤 쾌속정은 바닥이 통나무 모양이었는데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있어서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쏜살같이 미끄러지는 그 쾌속정에서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보라카이에 와서 투어를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바다의 배 위에서 바라보는 해변은 각기 다른 풍경이다. 게다가 배는 멀리 나갈 수 있으니 해변에서처럼 한정된 공간만 보는 게 아니다. 배가 천천히 바다를 가르는 동안 딸은 연신 셔터를 눌렀고 나는 선글라스를 통해 해변을 계속 바라보았다.

흰 구름 몇 점이 떠다니는 하늘 아래 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사이사이에 리조트들이 들어앉아서 한층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주변의 바위들 거의가 다 우둘투둘하고 구멍이 많은 것으로 보아 화산 폭발에 의해 생겨난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크로커다일이라는 섬 근처였다. 수심이 스노클링하기에 알맞은 곳이라서 주변에는 배들이 많았고 스노클링 장비를 갖추고 바다에 뛰어든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거나 잠수 중이었다. 딸과 아들은 장비와 빵을 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배 위에 앉아있던 나는 환경보존료인 50페소를 냈고 그들이 주는 빵을 떼어서 바다에 던졌다. 햄버거에 쓰이는 빵처럼 동그란 모양의 그 빵에는 기름기가 전혀 없어 보였다. 물고기는 빵을 떼어 던질 때마다 몰려들곤 했다. 더러 손바닥만큼 큰 고기도 있었지만 대부분 손가락 크기였다. 30분쯤 물에서 놀던 아이들을 쉬게 하려고 불렀는데 아이들이 그만 가자고 한다. 아이들 말에 의하면 물속에서도 지루하단다. 스킨스쿠버처럼 깊은 물에 들어가면 모를까 주변의 고기들이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독특한 리조트를 사진기에 담는데 배를 운전하던 남자가 유명한 권투선수 소유라는 설명을 한다. 산의 비탈을 따라 집이 하나씩 들어앉아 있는데 마치 3-4층짜리 초가집 같다. 물론 지붕만 풀로 덮여있지 다른 부분은 호텔처럼 세련된 느낌이다. 리조트가 무척 위태롭게 보였지만 화산폭발로 생겨난 바위산이라서 무너질 염려는 없는 것 같았다.

오는 길에 한 번 더 내려서 숲 근처를 둘러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게다가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아이들 살갗이 새빨갛게 탔기 때문에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진을 더 많이 찍었고 배도 천천히 움직였다. 투어 비용은 배에서 내린 다음 계산했다.

투어가 끝나고 나자 다른 할 일을 찾았고 여행책자에서 발견한 전망대에 가기로 했다. 다른 지역이라서 트라이시클을 잡아서 흥정을 하는데 왕복에 250페소를 달라고 한다. 나는 과감히 50페소를 깎았고 딸이 얼굴을 찌푸렸다. 전망대까지 가서보니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워서 역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에서 관람료를 50페소씩 받았다. 기사가 따라다니면서 가끔씩 카메라 셔터를 눌러 주었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사진을 많이 찍어서 시간이 지체되자 먼저 내려왔다. 아이들이 꽤 늦게 내려왔는데 알고 보니 자그마한 동물원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원에는 놓아기르는 원숭이 가족이 있고 새의 가족이 있다 한다. 젖먹이 원숭이와 놀다가 늦었던 모양이었다. 어미 원숭이가 새의 알을 꺼내가려고 해서 걱정이 되어 오래 지체했다는 말에 그 광경이 자못 궁금해졌다.

저녁을 먹은 다음 바닷가로 나갔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다. 불꽃놀이를 하느라 폭죽 터지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고 밤하늘에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졌다가 사라지곤 한다. 주변의 술집에서 흘러나온 조명이 야자수나 모래사장까지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다니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손님이 없는 술집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도 있었는데 술집을 위한 가수들이라기보다는 보라카이 해변을 걷는 관광객들을 위한 가수들인 것 같았다.

흥청거림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예스 맘-

길게 늘어 뽑는 그 소리에 쳐다보았는데 아주 어린 꼬마였다. 아이는 우리를 따라오며 그 소리를 되풀이했지만 나는 내미는 손을 무시했다. 10여분 정도 따라오던 아이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가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울먹거리며 사라지는 아이를 보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필리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여행이 끝나고 인터넷검색을 하면서부터였다. 필리핀에 대해 더 알고 써야 정확할 것 같아서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필리핀의 여성들은 천주교인들이기 때문에 낙태를 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미혼모도 많고 대부분의 가정에 아이들이 대여섯 이상이라 한다. 반면 여자들이 아이에게 관대하고 헌신적이라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남자들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봉급도 적다보니 여자들은 결혼 후 대부분 맞벌이를 하는데 전혀 불평이 없다 한다.

필리핀이 빈곤국가로 전락하면서 필리핀 여성들이 선진국 남성을 선호하게 된 것 같다. 젊은 여자들이 나이가 든 서양남자들과 다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서양남자들이 필리핀 여자를 선택하는 이유는 남편에게 헌신적이기 때문이라 한다. 물론 그런 선택을 하는 필리핀의 여자들은 경제적인 여유로움 때문이라는 것 같았다.

부드럽고 긴 생머리에 자그맣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보니 서양 남자들이 매력을 느끼겠다싶기도 했다. 유난히 부드러운 머리털을 길게 늘어뜨리고 걷는 아가씨들 대부분이 몸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허리가 가늘고 다리가 곧은 그들의 몸을 보면서 나는 가끔씩 감탄사를 흘리곤 했다. 미용실이 있었지만 파마를 한 여자들은 거의 없었다. 나이가 든 아줌마들도 단발이든 길든 생머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 술을 많이 마셨고 결국 다시 밖으로 나왔다. 2차를 가기 위해서였다. 여덟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해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일요일 밤이니 피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계획했던 대로 클럽에 갔다.

클럽의 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었고 다소 시끄러운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옆 자리에는 중국인들이 앉아있었다. 서양인들도 눈이 띄었고 필리핀인들도 보였다. 단체로 온 사람들이 바깥의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는데 남녀가 섞여 있었고 매우 친한 사이처럼 보였다.

실내의 음악은 밴드들의 연주에 따라 흐르고 있었는데 재즈였다가 댄스곡으로 바뀌곤 했다. 어떤 아가씨가 테이블 곁에서 춤을 추기에 나는 아예 무대로 나갔다. 모래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신발을 벗어버리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딱히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댄스곡이었고 실내가 적당히 어두웠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었다. 음악이 다른 음악으로 바뀌면서 내가 잠깐 동작을 멈추자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너덧 명이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가 멈추면서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에서 일어났고 무대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아이들도 무대에 나와서 함께 춤을 추었고 딸은 사람들과 영어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국에 와서 일 년 정도 어학원 선생으로 있었다는 백인청년은 한국말로 내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무대에 나와 혼자서 춤을 추던 아줌마가 한국인이라는 게 신기했던 것 같았다.

댄스곡이 계속 되었지만 열한 시쯤 되자 외국인들이 먼저 빠져 나갔다. 우리도 서둘러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네온은 명멸하고 있었고 해변은 다소 비어 있었다. 몸에서 취기가 다 빠져 나가지 않았던 탓에 숙소로 돌아오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숙소로 들어오는 골목길은 고즈넉했고 가로등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부분의 리조트의 창도 불이 꺼져 있어 우리는 발소리를 죽이면서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