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반대편에서 오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바짝 마른 몸에 겅중거리는 걸음이라 발이 허공을 헤매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나와 엇갈리려는 순간 할머니가 갑자기 내 몸을 안았다.

"아이구... 오랜만이여."

간혹 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지만 전혀 교류가 없는 할머니다. 팔은 나를 끌어안고 있지만 할머니의 시선은 좀 멍하다. 나는 웃으면서 할머니를 마주 붙들고 있었다.

"이거 먹어 봐. 친구가 줬당께."

흰 봉지가 팔을 스치는데 따뜻하다. 봉지를 여니 붕어빵 냄새가 솔솔 풍긴다. 내가 하나를 꺼내자 하나를 더 먹으란다. 아니라고 하면서 붕어빵을 베어 무는데 눈물이 핑 돈다. 이내 멀어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분이 삶의 무게에서 벗어날 때가 언제일까 생각했다.

  얼마 전 영암 월출산의 도갑사에 다녀왔다. 버스에서 내려 도갑사까지 가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걸었다. 동행은 멀리 울산에서 온 사이버 공간의 친구였다.

도갑사 가는 길에 왕인이라는 백제 시대의 학자가 남긴 왕인굴이라는 곳에 들렀다. (참고로 왕인은 영암의 역사적인 인물이다. 백제 근구수왕 때 일본으로 건너가 학자를 배출한 인물이다. 그의 후손은 일본에 있다.) 학자 왕인을 위해 지어진 사당이 있고 그곳에서 더 올라가면 그가 책을 보관하던 굴이 있다. 거기에서 나는 동행했던 울산 아지매와 다소 엉뚱한 얘기를 했다.

"야...솔직히 옛날 여인네들이 상을 받아야 하는 거야. 원래 선비라는 남정네들은 비가 와서 마당의 벼가 떠내려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아냐. 일하기 싫어 모른 척 했던 것 아닐까?"

"언니... 하긴 그래. 선비입네 하면서 책이나 읽고 있으면 무식한 아내가 모든 걸 다 했지. 아무 것도 모르니까 책 읽는 남편이 자랑스러웠는지도 모르겠지만..."

"글쎄...비 맞고 있는 나락을 가마니에 퍼 담으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욕을 했을 지도 모르지... 이 화상아...이 원수야...ㅋㅋ"

마애불처럼 새겨진 왕인석 앞에서 이런 대화를 하다가 학자도 학자이지만 학자들의 아내도 기려야 한다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다소 진을 빼고 있다 도갑사까지 걸어갔다. 가을은 주변의 산에 채색을 시작하고 있었다. 도갑사의 입장료는 3000천원이다. 우선 표를 끊는 아가씨에게 가격이 너무 높게 책정되었다고 따졌다. 아가씨는 뭐라고 변명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입장료는 비싸다.

대웅보전 앞의 석탑은 아래쪽에 시멘트 칠이 되어 있었다. 어느 곳의 석탑이든 늘 그런 식으로 보수를 한다는 게 쳐다보는 나로서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시간이 늦어 절 내부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바라보았다. 다만 소실된 절터의 자국이 절 앞으로 넓게 펼쳐져 있어 당시의 절이 상당히 웅장했음을 미뤄 짐작하게 해 주고 있었다.

등산객이 워낙 많아서 절은 늘 소란스러울 것 같았다. 은행나무의 열매가 떨어진 절 모퉁이에서 잠깐 멈춰 섰다. 스님은 뒷짐을 지고 있었고 허술하게 생긴 한 사내가 아궁이에 불을 집어넣고 있었다.

"부처님이 뜨시라고 불을 때는 건가요? 아님 스님 엉덩짝이 뜨끈하라고 불을 때는 건가요?"

"둘 다요..."

내 질문에 다소 뚱뚱한 체격의 젊은 스님이 대답한다. 내가 무심코 등을 보이며 걸음을 옮기던 스님을 쳐다보았다. 스님도 뒤를 돌아보는데 그의 눈길은 순전히 동행인 울산 아지매(친구는 학원 선생이다.)에게 머문다. 하긴 그녀는 가냘픈 몸에다가 화장을 곱게 했으며 나는 부대자루 같은 모습이니까.

내려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동동주까지 걸쳤으니 나른해서였다.

왕인석 앞에서의 대화에서처럼 비 오는 마당에서 나락을 퍼 담던 모습으로 살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나이 드신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도 훗날 치매 할머니가 되는 게 아닐까? 이젠 살아갈수록 삶에 욕심을 버려야하는데 그게 쉬울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