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은냄비 예찬
요즘 들어 양은냄비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규모가 작은 슈퍼에 가도 한쪽 귀퉁이에 크고 작은 양은냄비가 배열되어 있다. 지난 여름, 슈퍼에 들렀던 나는 양은 냄비를 들었다 놓았다하다가 하나 사들고 왔다. 순전히 충동구매였다.
사용하면서 새삼스레 놀랐던 점은 음식이 굉장히 빨리 끓는다는 것이었다. 너스레를 떨자면 가스렌지에 올려놓자마자 끓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불에 냄비를 올려놓았는데 이분이 채 되지 않아서 끓기 시작을 했으니... 아마 냄비를 사들고 왔던 그날의 일이었을 거다.
그릇이 가볍기 때문에 세척하기도 편해서 나는 요즘 찌개를 끓일 때도 자주 사용한다. 굳이 단점을 들라면 변덕스러운 여자의 마음처럼 빨리 식는다는 점이다. 여름에는 상관없으니 요즘처럼 추운 날에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뜨거운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그게 큰 단점은 아닐 것 같다.
석유곤로를 쓰던 시절에는 양은냄비가 집에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부부싸움을 할 때 사용되었던 건 아닌데 냄비 궁둥이에 상처를 입은 것들이 더러 있었다. 당시 찌그러진 양은 냄비는 곤궁한 살림살이의 대표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손님이 오면 그 냄비를 밥상에 올려놓는 일은 꺼렸었다.
항상 연탄아궁이에 올라가 있던 그릇은 양은양동이나 양은주전자였다. 그 후 차츰 양은그릇은 스테인리스에 떠밀려 사라져갔다. 양은그릇의 품위도 그렇거니와 그릇에서 유해물질이 나온다는 말에 더더욱 그 제품을 기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양은 냄비를 쓰는 사람이 늘어가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이면 맛있다는 말을 하지만 차라리 옛것에 대한 향수 때문에 사용한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한동안 무쇠솥이 유행을 하기도 했던 것은 가마솥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지 밥맛 때문은 아니었다. 솔직히 밥맛은 압력솥을 따라 올 그릇이 없을 것이다.
술을 좋아했던 터라 내겐 안주에 대한 향수가 많다. 이십 오년 전쯤 나는 종로통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어스름이 깃들던 시간에 무교동을 들어서면, 새빨간 낙지볶음이 작부들처럼 취객들의 발목을 잡곤 했었다. 같은 시각, 종로 일가 뒷골목에서는 삼치가 연탁 화덕에서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그렇듯 내 청춘은 술에, 연탄가스에, 장을 들볶던 고춧가루에 소진되어 갔다.
요즈음 가스 불에 삼치를 굽곤 하지만, 연탄 화덕에 구운 삼치구이만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낙지볶음에 고춧가루를 많이 넣진 못한다. 장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미각도 예전 같진 않다.
오늘 나는 양은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은 후, 우유로 만든 요플레를 후식으로 먹고, 커피를 한잔 마신다.
|
|
김은숙 2006-06-24
|
|
산문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