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얽힌 에피소드는 많다. 오늘은 비를 좋아하던 한 남자와 주고받던 메일을 떠올려 보기로 한다.

  그 친구와는 사이버 공간에서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약간 냉소적인 면이 있던 그와 메일을 주고받았다. 실은 그의 묘한 분위기 때문에 내가 먼저 메일을 보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호기심 충족을 위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하는 편이다. 글쟁이 이전부터 나는 늘 그랬다.

  그는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좋은 편이었다. 만연체를 주로 썼기 때문에 간혹 껄끔거리기는 했지만 내용이 알찼으며 때론 나를 웃기기도 했다. 상대를 비하하는 솜씨가 세련되어서 아마 나는 웃었을 것이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라는 영화에 대한 얘기였는데 구석자리에 앉은 관객에 대한 묘사였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그 영화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고 그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에 대한 얘기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쌍의 그 관객이 부부라는 점이었다. 아내가 옆자리에 앉은 남편에게 오징어 다리로 땅콩을 말아 입에 넣어주는 장면이었다. 아내 역할을 하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는 그 여자의 행색과 행동에서 초라함을 느꼈다.

  또 한번의 메일에서  그는, 한강의 배 위에 앉아있었다. 그의 메일에 의하면 한강 위에 띄운 배가 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바텐더를 마주보고 앉아 외국생활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 안으로 흘러드는 건 위스키였으며 그는 스트레이트로 마시곤 했다. 나는 당장 그 메일에 걸맞는 답장을 썼다.

  나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오십 줄에 든 주모를 앞에 두고 홀로 앉아 있었다.  내 볼은 복사꽃잎 빛깔이었고 웃음을 자주 흘리고는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의 표정이었다.  나는 막걸리 사발을 스트레이트로 비워내곤 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홀딱 벗고 비를 맞아 본 적이 있느냐고...그의 질문 메일에, 아마 나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설명했을 것이다. 아무 조건 없이 한번 만나자는 메일이 왔고  답장은 했지만 나는 그 말에 응하진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의 메일쓰기가 끝났다.

  간혹 비가 오는 날이면 메일이 생각난다.  아니, 홀딱 벗은 모습으로 비를 맞는 중년의 삐에로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