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글에서 언급했듯 밴쿠버에는 거지가 많다. 그들이 우리나라의 노숙자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젊은이들이 다수이고 더러 개를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총각처녀 커플도 볼 수 있었는데 내 눈엔 낭만적(?)으로 비쳐졌다.

차이나타운에는 특히 부랑자가 많다한다. 마약환자들이 섞여있기 때문에 딸은 내가 그곳에 가는 걸 금했다. 다운타운을 가기 위해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지나가야했기 때문에 눈여겨 볼 수 있었다.

빨간 등과 빨간 꽃, 건물의 기둥이나 지붕의 빨간 도색, 게다 상가의 모든 물건을 불그스름하게 만들어버리는 빨간 불빛까지 내겐 유혹적이었다. 오가면서 살펴보니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차를 하곤 했는데 차이나타운의 상가를 이용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차이나타운 거리에는 낮이나 밤이나 부랑자와 엇비슷한 차림으로 어슬렁대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중에는 불구자도 있었다. 나처럼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금지된 일에 더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나는 딸 몰래 차이나타운을 한 바퀴 돌아보자고 조카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는 불상사가 일어날까봐 그곳의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진 못했다. 중간에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는 바람에 경계를 하기도 했지만, 돌아보니 그는 나이가 든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중국인 같았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그가 도망치듯 가버렸다. 내가, 자신이 생각하던 얼굴이 아니었는지, 아니라면 내 눈초리가 무서웠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라는 말을 연발하듯 손을 가로저으며 무어라 중얼 거렸었다.

차이나타운의 가게들은 대부분 규모가 컸으며 대로변은 거의 식료품 가게였다. 뒤쪽으로는 음식점들이 더러 보이기도 했다. 뒤쪽의 길로 들어서면서 도로와 연결된 골목 안을 힐끗힐끗 훔쳐보곤 했는데 음산한 느낌이었다. 벽에 낙서가 지저분했고 대부분 건물들이 낡은 데다 돌아다니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사거리에 접해 있는 한 빌딩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이었는데 차림새로 봐서 부랑인들 같았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실감나는 거리였다. 돈을 달라고 불쑥 손을 내미는 부랑자도 있는데다 그들의 표정이 무서웠기 때문에 우리는 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정류장을 찾았다.

조카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딸이 다니는 인도 레스토랑에서 한국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딸과 전복을 넣은 닭죽을 끓일까 해서 재료를 사러 갔는데 전복이 지나치게 비쌌다.

대신 닭만으로 요리를 하기로 했다. 닭은 부위별로 팔고 있어서 날개와 북채를 샀다. 볶음요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주방에 구비되어있는 볶음냄비와 전기렌즈였다. 냄비바닥의 코팅이 벗겨져 있었고 전기렌즈는 두 개가 고장이 나있었다.

커피주전자나 올려놓을 만큼 작은 코일의 렌즈 위에서 닭고기를 익히고 있으니 속이 터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요리가 완성되었다. 딸은 먹어보더니 매콤하면서 맛있다고 한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 딸과 함께 레스토랑에 들르라는 전갈을 받았다. 레스토랑에 종사하는 사람은  30% 정도 저렴하단다. 돈을 깎아주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갔다.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앞에 바다가 있어 그만이다.

맨 먼저 와인이 나왔다. 우선 고르기 위해 석 잔을 마셨다. 물론 맛보는 잔은 양이 좀 적다. 음식은 우리가 두 가지를 주문했고 사장이 서비스로 두 가지 음식을 종업원의 손에 들려 보냈다. 와인의 경우 종업원이 몰래몰래 가져다 준 것 까지 각자 석잔 씩을 마셨던  탓에 취기가 오르기도 했다. 서비스를 빼고도 6-7만원은 될 것 같은데, 사장님께서 글쎄 돈을 안 받겠단다.

레스토랑을 두 개씩이나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 마인드가 다른 것 같다. 음식이 공짜라서 사장의 얼굴이 유난히 순박하게 보이는 것일까? 나는 그를 보면서 땡큐를 연발했다.

밴쿠버의 정보는 딸이 아는 어느 아가씨의 입을 통해서였다. 40정도 되는 나이이니 아가씨라기보다는 독신녀라는 표현이 알맞을 것 같다. 밴쿠버체류 10년이 되었다는 그녀는 17평정도 되는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새 아파트라 시세가 1억5천정도 간다고 한다.

밴쿠버의 집값은 생각보다 싸지 않다. 개인주택도 보통 3-4억씩 간다. 물론 모기지론으로 구입하니 이삼십 년 동안 열심히 빚을 갚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파트는 노화가 되면 점점 가격이 떨어진다. 재개발로 헐리게 되면 대지 지분만 환산해서 돈을 돌려받는다한다.

그녀는 내가 버스에서 어떤 중국남자가 말을 걸었다고 하니 잘해보지 그러냐며 웃는다. 남루한 차림이라고 했더니 중국인들은 남루할수록 부자란다. 오십대의 한 캐내디언이 내게 니하오마라는 말을 건네서 웃은 적이 있었다. 버스에서 말을 걸었던 키가 작은 중국인도 내게 중국어로 말하다가 내가 코리언이라고 하니까 다시 영어로 뭐라고 했었다. 그걸 떠올리며 밴쿠버 사람들에게는 내가 중국여자로 보이나보다, 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내게, 한국과는 달리 남자들이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화려한 스타일이었다면 오히려 그들이 거부감을 가졌을 거라고 즉답을 했다.

그녀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고 참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진보의식을 갖고 있다는 게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다음에 꼭 만나자고 했다. 그녀는 나더러 밴쿠버에서 내 얼굴이 먹히는 것 같다면서 밴쿠버에 눌러앉으라는 농담을 한다. 만남이 비록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내 눈에 비쳐진 그녀의 삶이 참 부러워 보인다.

밴쿠버에서는 동물들과의 에피소드가 많다. 화이트락에 가면서는 점심으로 피시앤칩스를 먹기로 했었다. 유명하다는 그 음식점은 배를 개조한 레스토랑이었다. 그 음식점 외부에 나무식탁이 너덧 개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주변에 갈매기와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가끔씩 식탁 옆으로 내려앉곤 했다. 옆자리에서도, 우리도, 음식을 몇 번 던져주었다.

갑자기 갈매기 한마리가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는데 알고보니 더 안준다고 땡깡을 부리는 중이었다. 옆자리의 백인들은 갈매기를 보면서 연신 깔깔 거렸다. 이후 우리는 안하무인의 갈매기를 외면했고 착한(?) 비둘기에게만 감자칩을 던져주었다.

스탠리파크 초입의 풀밭에서는 기러기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풀을 뜯거나 더러는 풀밭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앉아있던 노신사에게 다가가 대뜸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노신사는 점심식사 중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그 기러기에게 빵을 나눠줘야만 했다. 나도 노신사처럼 웃음을 머금고 기러기를 바라보았다. 특히 스탠리파크는 인간과 동물의 교류가 너무 자연스럽다는 느낌이었다.

밴쿠버에는 아름드리 고목도 많다. 겨울이 우기의 정점이고 특히 우기가 길어서 사시사철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 같았다. 킹스몰을 가는 도중 지나쳤던 길가에는 가지가 양쪽으로만 자라는 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전깃줄이 원활하게 지나도록 가운데만 가지치기를 해주는 까닭이었다. 우리나라는 전깃줄이 지나는 곳에 서 있는 나무는 가지들을 싹둑싹둑 잘라버리니 그러지 말고, 그들의 방식을 본받아도 될 것 같았다.

남은 며칠 동안은 쇼핑도 좀 했고 몇 군데 더 돌아보기도 했다. 그랜빌 아일랜드에 들러서 공장에서 직접 들여온다는 맥주도 마셔봤다. 거기에는 대형 마켓이 있었고 그 부근에 맥주공장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들르는 필수코스 중 하나이다.

입국하던 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꾸렸다. 11시30분 티켓이었는데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9시쯤이었다. 수속을 밟고 공항의 팀홀튼에서 딸과 함께 시럽을 뿌린 빵을 먹었다. 커피를 마시던 딸의 표정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섭섭한 얼굴이 된다. 한 달 동안 내게 불친절하게 굴어서 후회가 되나보다. 게이트 번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돌아보니 딸은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다.

기내의 내 좌석은 가운데 앞자리 맨 왼쪽이었다. 세 좌석 다 한국인만 앉은 셈이다. 옆자리에는 밴쿠버에 거주하는 여인이 앉았고, 그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기러기 아빠였다. 사업을 하는 그는 아내와 두 아이가 머무는 밴쿠버에 다녀오는 중이었다. 일주일간의 여행이었는데 그는 밴쿠버도 별로 구경하지 못하고 거의 집에만 있다가 돌아가는 중이라 했다.

전업주부인 아내는 골프를 배우고 있다는데 남자의 배를 쿡쿡 찌르면서 몸 관리를 하라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마주칠 수 있는 배가 약간 나온 전형적인 오십대의 몸매였다. 얘기로 미뤄 보건데 그가 아내와 함께한 일주일이 전혀 유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가운데 앉았던 곱상한 여인은 남편이 외도를 해서 괴롭다며 스튜어디스에게 와인을 갖다 달라더니 연거푸 마셨다. 여인은 한숨을 쉬더니 했던 말을 계속 반복했다. 아무래도 주사였다. 말이 많던 그 여인은 얼마 되지 않아서 깊은 잠에 빠졌지만 나는 밴쿠버 행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아들이 나와 있었다. 취업준비생일 때와는 달리 용모도 근사하고 표정도 한결 여유로워 보인다. 한 달 만에 보는데 엄청 오래된 느낌이다. 공항의 식당에서 나는 아들에게 줄 선물을 꺼냈다. 말린 연어와 아들이 어깨에 메고 다닐 가방 외 사소한 몇 가지였다. 와인은 집에서 먹자면서 다시 내 가방에 넣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쯤 나는 인천공항에서 청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